공자가 광(匡)에서 곤란을 당했을 때 안회(顔回)가 뒤처졌다 나타났다.

"나는 네가 죽은 줄 알았다(吾以女爲死矣)."선생이 말하자 안회가 대답했다. "선생님이 계신데 회가 어찌 감히 먼저 죽겠습니까(子在, 回何敢死)?" <논어 선진(先進)>

광 땅을 지나다가 '공공의 적' 양호(陽虎)로 오해받아 죽을 뻔한 위기를 가까스로 넘긴 공자가 뒤늦게 나타난 제자에게 스승답지 못한 투정을 부리는 장면이다. 당시 공자 60세, 제자 안회는 30살이나 어렸다. 제자는 그러나 10년 뒤 스승보다 먼저 세상을 떴다. 떠돌이 망명생활 14년을 마치고 노(魯)에 안착한 지 1년 만이었다.

"아! 하늘도 나를 버리는구나(天喪予, 天喪予)!"

선생은 통곡했다. 공자가 만든 예법에 통곡은 육친 사이에만 할 수 있었다. 스스로 예법을 깨는 선생에게 한 제자가 주의를 주었다.

"선생님은 지금 통곡을 하고 계십니다(子慟矣)."

공자는 순간 당황했지만 곧 기지를 발휘해 이렇게 둘러댔다.

"아, 그랬는가. 하지만 저 죽음을 통곡하지 않으면 대체 누굴 위해 통곡한단 말이냐(有慟乎. 非夫人之爲慟而誰爲)?"

공자학단(孔子學團)의 제자가 3000명이라지만 선생에게 가장 믿음직했던 것은 자로(子路)와 안회였다. <공자가어>에 특별히 두 제자의 이름을 딴 항목이 따로 실려 있는 것도 이런 사정을 말해 준다. 제일 연장자인 자로가 궂은 일을 도맡아 스승을 지킨 막대기 역할을 했다면, 사려깊고 진지해서 스승으로 하여금 '후배가 무섭도다(後生可畏)'는 탄식을 자아내게 했던 안회는 늘 스승의 사색과 대화의 상대였다. 그래서 시라카와 시즈카 같은 학자는 "유교 정신은 공자가 죽으면서 끝났고, 안회가 죽자 후계가 단절됐다<공자전>"고 했다.

스승은 제자의 안빈낙도(安貧樂道)를 가장 높이 쳤다. 살았을 때는 "석 달이 지나도록 한 번도 언행이 어진데서 벗어나지 않았다(其心三月不違仁)"고 극찬했고, 죽자 "화를 내지 않고 같은 잘못을 두 번 범하지 않았다(不遷怒, 不貳過)"고 기렸다.

이처럼 대단한 군자였던 안회가 실제로는 자주 발끈하고 성을 냈음을 짐작케 하는 기록이 있다. 기원전 1세기를 살았던 유향이 항간의 이야기들을 모은 <신서(新序)> 잡사(雜事)편에 전하는 이야기다.

안연(淵은 안회의 자)이 정공과 앉았는데, 대부 동야필이 말을 몰고 지나갔다.

정공 : 동야필이 말 모는 솜씨는 정말 훌륭하구나.

안연 : 멋지기는 하나 저 말은 곧 실족할 것입니다.

정공 : (불쾌한 표정으로 주위 사람에게) 군자는 남을 헐뜯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이제보니 군자도 참언을 다 하는군.

이번에는 안연이 불쾌해서 계단을 내려가버렸다(顔淵不悅, 歷階而去).

제후 면전에서 일개 사대부가 발끈하고 돌아서는 모습이 생생하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과연 말이 거꾸러졌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정공은 수레를 보내 정중하게 안연을 다시 불러 미리 내다볼 줄 알았던 혜안의 자초지종을 물었다. 안연이 답했다.

"옛날 순은 백성을 끝까지 몰지 않았고, 말 잘 부리던 조보는 말이 힘을 다쓰게는 하지 않았습니다(舜不窮於其民, 造父不盡其馬). 방금 동야필이 고삐를 잡고 말을 모는 모습은 정확하고 예에 맞지만, 멀고 험한 곳까지 내달았을 때 말은 힘이 다하고 맙니다. 그런데도 그의 요구는 그칠 줄 모르기 때문에 말이 실족할 것을 안 것입니다. "

요즘 우리 사회가 정신차리지 못할 정도로 어수선하다. 만질수록 커지는 스캔들과 문제, 사건들로 현란할 지경인데, 그렇다고 현안들이 깔끔하게 정리된 것도 없다. 전선의 전방위 확대다. 안회가 조보를 꺼낸 것은 정치건 사업이건 매사에 힘의 여유를 남겨둬야 낭패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다. 문제를 줄이고 여력을 되돌아봐야 할 시점에 그저 내달리기만 해서는 곤란하다.

편집위원 rgbac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