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碑)만 세우고 묘를 만들지 않았는데 그 덕이 널리 알려져서 찬양할 필요조차 없기 때문이며,또한 글이 없더라도 그 사람을 칭송할 수 있기 때문에 비만 세우고 글을 짓지 않았다. 지금까지 이를 일컬어 백비라고 한다…. 일찍이 당나라 때 몰자비(沒字碑)가 있어 이 일과 유사하다고 들었으나 나는 고루하여 기억하지 못한다. 그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또한 '기이한 칭송(異褒)'이라고 할 만하다. " <글자 없는 비(白碑)>

조선 후기 정조의 문체반정에 맞서다가 '자질구레한 글이나 쓴다'고 찍혀 고생했던 글재주꾼 이옥(李鈺 · 1760~1815년)의 글이다. 마흔 살 무렵 합천에 잠시 귀양 갔을 때 그곳에 집성촌을 이룬 인천 이씨 선조의 청렴과 곧음을 기려 옛날 고려 국왕이 세워 줬다는 맨비석을 보고 쓴 소품이다. 죽은 이를 기리는 묘비에 응당 있어야 할 글자가 없을 때 이를 보는 산 사람의 심사는 이처럼 기이함을 넘어 대단히 복잡해지게 마련이다.

이옥이 기억해 내지 못한 것은 중국 여황제 무후(武后)의 무자비(無字碑)를 말한다. 무후는 남편인 고종이 56세로 죽자 시안의 건릉에 장사 지내고 입구에 키가 6m를 넘는 쌍둥이 신도비 2개를 마주 보게 세웠다. 서편 돌에는 남편을 기리는 송덕문 8천여 자를 직접 짓고 아들인 중종의 글씨로 새겨 '고종의 성덕을 기록한 비(述聖記碑)'라고 불렀다. 맞은편 돌은 훗날 합장될 자신의 몫으로 남겨 두고 후손이 자신을 마음껏 기려 줄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고종이 죽은 지 2년 만에 이(李)씨의 당 대신 무(武)씨의 주(周) 왕조를 세운 것이 문제였다. 82세로 죽기 직전 왕조를 아들에게 되돌려 주고 '나를 황제가 아닌 일개 황후로 대접해 달라'고 유언을 남겼지만,송덕문에 새길 경력에 찬탈이라는 대역 행위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아들도 외면했고 신하들도 자칫 멸문지화를 부를 일을 극구 사양하는 바람에 맨비석 그대로 남게 됐다.

물론 이설도 있다. 당시 유행한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함을 극대화한다(無爲而無不爲)'는 도가 풍조에 따라 필설로 다 못할 업적을 무자로 드러냈다는 것이다. 훗날 술성기비가 바람에 무너져 동강이 났어도 무자비는 1300년 동안이나 건재하다는 점,그리고 중국 역대 황릉 중에 건릉만이 도굴의 화를 입지 않아 문화재 호사가들의 입맛을 당기게 하고 있는 것이 이런 무자비의 공덕이라는 속설도 있다.

있어야 할 것을 비움으로써 오히려 그 뜻을 드러내는 무자비의 정신을 온전하게 구현한 것은 이보다 300여년 앞선 동진(東晉)의 명재상 사안(謝安 · 320~385년)의 묘비다. 그는 전진(前秦)의 왕 부견이 대륙을 거의 통일하고 한족 왕조의 명맥을 끊어 놓을 찰나에 이를 좌절시킨 영웅이다. 북방 다섯 오랑캐(五胡)의 하나인 전진의 부견은 고구려에 불교를 전해 준 인연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하다.

사안의 묘비는 난징에 있는데,비석은 있으되 글이 없는 까닭을 후세 기록은 '그의 공덕은 말과 글로써 나타낼 수 없으므로 맨비석을 세웠다(以安功德,難以稱述,故立白碑)'라고 전하고 있다.

전임 대통령이 써 놓은 '깨끗한 대통령'이란 자찬(自讚) 비문(?)이 온나라를 뒤흔들고 있다. 그토록 도덕성을 강조한 그가 재임 중 낡은 정치의 핵심이라고 질타했던 검은 돈을 받았다는 배신이 문제다. 다른 전임들과 비교해 풍기는 돈 냄새(銅臭)나 솔직함의 차별성 정도는 참작해도 좋으련만,실로 '한 사람의 축원이 만인의 저주를 이길 수 없는(一祝不勝萬詛)' 고약한 상황이다.

더 고약한 것은 '얼마나 깨끗한 대통령이었는지 두고 보겠다'고 통쾌해하는 반응이다. '혼자 깨끗한 척하더니 별수 있나'라는 뉘앙스에 잔뜩 방점이 찍혀 있다. 깨끗한 정치라는 소중한 가치를 저버린 행위를 탓해야지,'너나 나나 뭐가 다르냐'는 식으로 문제를 환원시켜서는 곤란하다.

편집위원 rgbac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