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오후 1시,혼자서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두물머리로 가는 중앙선 전철에 올랐다. 이 시간에는 전철에도 사람이 별로 없다.

차창 밖을 보면서 운전을 못한다는 게 참으로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기름값이 오르고 주차하기가 힘들다 해도 '마이카'가 있으면 이럴 때 얼마나 좋을까. 이런저런 생각 속에 흘러가는 풍경들이 익숙하다. 8년쯤 전 군대 간 남자친구를 면회하러 기차에 올랐던 기억이 났다. 아련하면서도 반가운 추억이다. 차가 없는 것이 늘 나쁘지만은 않은가 보다.

양수역에 내렸다. 갓 만든 역사의 느낌이 싱그럽다. 세미원 방향으로 나가 보니 엠티 온 대학생들이 라면과 술,고기 등이 든 봉투를 민박집 트럭 안으로 부지런히 옮기고 있다. 역 앞으로 난 길을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점심을 거른 탓에 길 옆으로 늘어선 식당들의 메뉴판에 눈이 자꾸 간다. 만두국,순두부 등 나름대로 다양하다.

아직은 봄이 덜 온 것 같다. 추위 때문에 걸음이 빨라졌다. 5분 정도 내려가니 삼거리가 나왔다. 오른쪽으로 꺾어 다시 5분 정도 걸어가니 두물머리 산책로가 나온다. '두물머리'는 남한강과 북한강의 두 물줄기가 만난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산책로 왼쪽으로는 얼음 덮인 강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던 다산 정약용은 이 강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작가 한승원은 소설 《다산》에서 정약용이 18년 동안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넘어지더라도 다치지 않는 고향 운길산 수종사 인근의 비단이불 같은 숲과 늘 넉넉해 보이는 두물머리 소내의 물너울'을 그리워했다고 썼다. 정약용은 말년에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할 동안 꿈에 그리던 두물머리를 눈에 실컷 담았을 것이다.

두물머리 얼음 위로 이리저리 금이 가 있다. 봄이 덜 왔다는 생각을 바꿔야겠다. 이미 봄은 와 있다. 겨우내 꽁꽁 얼었던 흙길도 갓난아이 살결처럼 보드랍다.

느린 걸음으로 15분 정도 가니 6번 국도를 잇는 신양수대교 아래 높이 솟은 500평 규모의 온실이 눈에 들어왔다. 사단법인 우리문화가꾸기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석창원이다. 석창원은 석창포가 있는 뜰을 말한다. 한강 물을 퍼올린 뒤 수생식물인 석창포를 심은 도랑을 통해 연밭으로 흘러 내려가게 조경을 해놓은 곳이다.

입구에서 입장료를 내려고 지갑을 꺼내니 안내하는 여자가 "여기 무료예요"라며 웃는다. 돈을 번 기분이다. 온실 안으로 들어서자 봄내음이 난다. 습기차면서도 따스한 느낌이 오랜만이다.

석창원은 매화꽃을 미리 터뜨리기 위해 온실 온도를 4도 이하로 일정하게 맞춰 놓았다. 이런 방식으로 꽃을 피운 석창원에서는 설 연휴인 지난 1월 25일부터 '매화꽃 잔치'를 열고 있다.

'매화꽃 잔치'는 당초 이달 22일 끝날 예정이었지만 방문객들의 열광적인 반응 덕분에 3월15일까지 연장하기로 했다. '매화꽃 잔치' 관람은 홈페이지(www.semwon.or.kr)에서 사전예약을 해야 무난히 입장할 수 있다.

석창원 안에는 가지각색의 매화들이 자태를 뽐내고 있다. 홍매는 귀때기가 바알간 새색시같다. 백매는 고고한 도련님같고,가지를 늘어뜨린 수양매는 수줍은 소녀의 모습이다.

온실 안에 심어진 매화나무는 30그루다. 매화분재도 50개에 이른다.

이곳에선 정약용의 '죽란시사'를 잇는 뜻에서 매화시사회도 연다. 3월15일까지 석창원의 매화를 주제로 시와 편지를 쓰고,그림도 그리고,사진도 찍어 기량을 겨룬다. 정약용은 마당에 살구꽃,국화,연꽃,매화 등이 필 때마다 친구들과 시를 지으며 어울렸다. 이것이 '죽란시사'다.

매화 말고도 볼거리는 많다. 붉은 동백꽃,노란 수선화,열매가 탐스러운 유자나무 등이 눈길을 끈다.

이동식 정자인 '사륜정'은 조선시대 버전의 캠핑카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사륜정기를 보면 풍류를 즐기기 위해 정자에 네 바퀴를 달아 경치 좋고 서늘한 곳을 찾아 움직이는 이동식 정자를 설계한 기록이 나온다. 800년 만에 이를 복원한 것이다.

우리나라 전통정원의 구조 중 하나인 '석가산'도 재현해놨다. 겸재 정선의 금강산 그림을 입체적으로 구성한 것.보덕굴,정양사,묘길상,삼불암,마하연 등도 축소 복원했다.

시간이 남는다면 석창원 옆으로 이어진 산책로를 좀 더 거닐어보는 것도 좋다. 두물머리를 옆에 끼고 걷다 보면 길 끝에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예전부터 무속인들이 자주 와 기도하던 기도터라고 한다. 느티나무 곁에는 고인돌이 전시돼 있다. 1974년 팔당댐 수몰현장에서 출토된 것으로 북두칠성을 의미하는 작은 구멍 7개가 있다.

느티나무에서 돌아서니 3시30분이 훌쩍 넘었다. 다리가 아파온다. 편한 신발을 신고 오길 잘했다. 모자도 쓰고 왔으면 좋았을텐데….춥지만 햇살은 따갑다. 좀 더 따뜻해지면 길가 나무들이 잎을 틔우고 그늘을 만들어 줄 것이다.

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

[ 주변볼거리 & 가는 길 ]

△인근 볼거리=다산 정약용 선생이 기거한 다산유적지와 수종사 등이 산재해 있다. 영화 '공동경비구역JSA''취화선' 등을 찍은 남양주 종합촬영소도 가깝다.

△가는 길=올림픽대로에서 미사리를 지나 팔당대교를 건너 6번국도(홍천 방향)로 달리다 신양수대교를 건너자마자 우회전해 양수리 방향으로 500m 가면 문화체육공원과 주차장 팻말이 보인다.

전철로도 갈 수 있다. 시청역에서 1호선을 타고 회기역까지 간 다음 중앙선으로 갈아타 양수역에서 내리면 된다. 1시간10분 정도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