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메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중)

20년 전인 1989년 3월7일 종로의 한 심야극장에서 만 29세의 젊은 시인이 시신으로 발견됐다. 사인은 뇌졸중으로 추정됐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두 달 후에 그의 첫 시집이자 유고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이 세상의 빛을 보았다.

그렇게 20년이 흐르는 동안 그의 작품에 나타난 감성과 갑작스럽게 요절한 비극적인 최후,죽음을 둘러싼 온갖 추측까지 덧칠되면서 시인 기형도는 '한국 문학의 지울 수 없는 신화'가 됐다. 문학청년들에게 그는 통과의례였고 문외한들도 그의 시 한 구절 정도는 어디선가 들어본 경험을 지니게 됐다.

《입 속의 검은 잎》은 1989년 5월 출간 이래 지금까지 65쇄를 돌파하며 24만부 이상 팔린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았다. 요즘도 1주일에 70~100부 정도 나간다고 문학과지성사 측은 전했다. 그의 10주기였던 1999년에 미발표 유고들과 메모들을 덧붙여 펴낸 《기형도 전집》(문학과지성사)도 15쇄를 기록했다. 시단에서는 기록적인 수치다.

오늘날에도 이어지는 기형도의 인기에 대해 문학평론가인 이광호 서울예대 교수는 "그가 작품에서 보여준 현대적이고 도회적인 감수성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공감을 이끌어낼 만큼 '시대를 앞서가는 징후'와 같다"며 "요절한 시인에게 '영원한 청년'의 이미지가 부여되면서 낡은 느낌을 주지 않는 점도 젊은 독자들에게 흡입력을 발휘한다"고 분석했다.

기형도의 20주기를 맞아 문집 및 관련 행사가 풍성하게 준비됐다. 다음 달에 출간될 기형도 20주기 문집 《정거장에서의 충고-기형도의 삶과 문학》(문학과지성사)에는 기형도의 현재적 의미와 작품세계를 조명하고 지인들의 개인적 추억을 정리한 글들이 수록된다.

시인 이문재씨는 "내가 아직도 '희망'과 '사랑'이라는 시어와 종결어미 '-네'를 잘 쓰지 못하는 이유는 기형도보다 더 빼어나게 구사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털어놓았다. 문학평론가 이영준씨는 "새로운 소식을 전할 때마다 환하게 웃으며 스타카토로 '경악,경악!'하고 말하던 그 선량해 보이는 청년이 남겨놓은 시의 절망은 한동안 나를 당혹케 했다"고 썼다. 소설가 성석제씨는 "그는 나보다 먼저 학교 신문에서 공모하는 무슨 문학상 상금을 타서 배부른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너도 상금받으면 먼저 책하고 타자기부터 사.눈 딱 감고'라고 했다"고 전했다.

젊은 시인들 또한 '2000년대 후반에도 여전히 기형도 광팬들이 태어나고 있다'(김행숙),'시로서 접한 첫번째 시인이 기형도'(김경주),'한 세계를 정리하면서 또다른 한 세계를 열어준 시인'(심보선)이라고 기형도가 미친 영향을 증언했다.

다음 달 5일 서울 홍익대 부근 이리카페에서는 기형도의 동료 및 후배 문인들이 참여하는 추모 문학 콘서트 '기형도 시를 읽는 밤'이 열리고,6일에는 경기도 광명시 광명시민회관 소공연장에서 기념행사 '어느 푸른 저녁의 노래'가 개최된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