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 선종이 엄청난 추모인파를 동원하며 전국에 '사랑과 화해의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김 추기경이 선종한 지 나흘째인 19일 빈소가 차려진 서울 명동성당 일대는 고인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기 위한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새벽 2시부터 모여들기 시작한 조문객은 명동성당 입구에서 삼일로로 이어져 퇴계로까지 3㎞에 이르렀다.

이날 오전 빈소를 찾은 70대 조문객은 "새벽 2시부터 줄을 서서 기다려 4시간 만에 고인을 뵙고 기도했다"며 "앞으로 추기경의 정신을 받들어 사랑과 나눔의 삶을 살 것"이라고 말했다.

장례위원회 측에 따르면 이날 하루 동안 다녀간 조문객은 15만명에 달했다. 17일과 18일 25만여명이 빈소를 찾은 것을 포함하면 조문객은 40만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조문행렬에는 천주교신자뿐 아니라 불교 기독교 원불교 등 다른 종교인,여야 정치인,시민사회단체와 주요 기업 임직원 등 사회 각계 각층이 동참했다. 김 추기경의 선종을 계기로 심하게 반목했던 우리 사회에 미움 대신 사랑,절망 대신 희망을 나누려는 조짐이 일고 있는 것이다.

김 추기경이 자신의 각막을 기증한 이후 장기 기증이 급증하고 있다. 사단법인 한국인체조직지원본부(KOLEC)에 따르면 가수 장윤정과 서인영 박정아 박현빈 윙크 V.O.S 쥬얼리,개그맨 양원경 등 연예인 10여명이 각막 기증을 약속했다. 장윤정은 "어렸을 때 화상을 입은 친구가 성장할 때마다 피부 이식수술을 받아야 하는 걸 보면서 늘 안타깝게 생각했다"며 "각막 기증뿐 아니라 인체 조직 기증의 필요성을 주위에 널리 알리겠다"고 말했다.

[김수환 추기경 장례] 큰 어른 마지막길…미움 대신 사랑, 절망 대신 희망을…
사랑의 장기기증 운동본부에도 추기경 선종 이후 지난 18일까지 사흘간 350여명이 각막과 장기기증 의사를 밝혔다. 이는 평상시 3~4배 수준이다. 장기 기증에 관한 전화 문의도 2~3배 많아졌다.

평소 가난한 사람들을 따뜻하게 보살폈던 추기경의 정신은 정부에도 영향을 미쳤다. 행정안전부는 19일 열린 차관회의에서 장 · 차관급 이상 정무직 공무원들이 소외계층을 돕기 위해 이달부터 1년간 연봉의 10%를 반납하기로 했다.

추기경이 뿌린 '바보정신'의 씨앗도 사회운동으로 확산되고 있다. 홍사종 숙명여대 교수,이명현 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김병종 서울대 미대 교수 등은 오는 26일 '바보정신이 세상을 구원한다'라는 주제 아래 '바보운동' 모임을 창립한다. 이들은 "생전에 김 추기경이 강조한 '사랑과 나눔'은 곧 '바보정신'으로 집약된다"며 "때로 손해를 보고 남도 배려하는 삶의 소중함을 알리겠다"고 말했다. 창립회원들은 각막 및 장기 기증운동에도 앞장설 예정이다.

천주교 한마음한몸운동본부의 김용태 신부(본부장)는 "김 추기경이 떠나신 후 어둠과 절망으로 뒤덮였던 사회가 한결 밝아지고 있는 느낌"이라며 "분열과 반목하던 사회 각계가 사랑과 화합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