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모 >

장안의 인기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주인공 ‘구준표’에 비견될 만한 꽃미남이 2500년 전에도 있었다. 빵빵한 재력과 좋은 가문, 빼어난 학력에 달변을 바탕으로 젊은 시절부터 초고속 승진을 하고, 조각같은 외모를 겸비한 동화속 왕자님 같은 존재가 고대 그리스에 실제로 있었던 것이다.
[김동욱 기자의 역사책 읽기] 구준표를 꼭 닮은 2500년전 원조 꽃미남의 운명



아테네 출신으로 아테네와 스파르타, 페르시아를 무대로 활동한 이 ‘고대 세계의 구준표’는 스파르타와 관계가 있는 아테네 명문가 출신의 빵빵한 집안 배경에 학력은 오히려 드라마속 구준표 보다 좋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인류 역사상 최고 사상가중 한명인 소크라테스의 직계 제자로 플라톤과는 동문인 것. 여기에 아테네 최고 정치인이자 아네네 민주주의의 상징적 존재인 페리클레스를 후견인으로 삼았고 젊었던 시절부터 아테네 주요 요직과 이후 우여곡절 끝에 아테네의 라이벌인 스파르타와 페르시아의 고위직을 역임했으니 경력 면에서도 구준표에 빠질 것이 없다. 무엇보다 이 친구는 남다른 ‘어여쁜’ 외모로 어려서부터 주목받았고 서양사 최초의 ‘댄디 보이’로 불린다는 점에서 ‘원조 꽃미남’이라고 할 수 있다.

알키비아데스의 가문은 아테네의 유력귀족 가문이었다. 그의 가문은 부유한 귀족으로 호머의 서사시에 나오는 네스토르의 후손을 자처했다. “그의 피속에는 아주 많은 영광과 광휘가 흐르고 있다”는게 당대인들의 표현. 그의 가문은 아테네 유력 정치세력에 연줄이 두루 닿는 마당발이었고 아테네 이외 그리스 세계에 두루 커넥션이 있었다. 특히 스파르타와 인연이 깊었다. 그가 어릴 때 그를 돌본 유모는 스파르타 여인이었고 그가 아테네에서 처음으로 정치적 활동을 시작한 것도 아테네내의 스파르타인의 대표로서 였다.기원전 421년 스파르타 대표가 화약체결을 위해 아테네를 방문했을 때 알키비아데스는 그의 가문과 끈이 닿았던 스파르타 유력가문과의 관계를 최대한 활용, 아테네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

알키비아데스가 아직 어릴 때 그의 아버지가 전투에서 전사했는데, 이때부터 아테네의 유력정치인인 페리클레스가 그의 후견인으로 그를 돌보며 막강한 빽 역할을 해줬다. 페리클레스는 무려 30년간 실질적인 아테네의 지배자 역할을 하며 아테네 전성기를 이끈 인물. 알키비아데스로선 인생의 출발에서 더 이상 좋은 출발이란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아직 아름다운 외모가 찬양의 대상이 되는 호머시대의 전통이 남아있던 때에 그의 외모는 그를 남다르게 했다. 알키비아데스 사후 500년 뒤에 그의 전기를 기술한 플루타르코스는 “매 계절마다 꽃이 피듯 그가 자라났다”고 묘사했고 “그가 어릴때부터 그의 미모를 찬미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쌓였다”고 전해진다. 이같은 외모는 그가 출세하는데 큰 도움을 준 요소였다. 네포스는 그의 외모와 자질을 두고 “그 누구도 알키비아데스를 능가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

그는 마치 여자처럼 머리를 길게 기른채 자주색 토가를 입고 광장에서 달변을 토했다. 그는 당대의 패션 리더였고 트랜드 세터였다. 당대의 에우폴리스의 기록에 따르면 “아테네 사람들은 그가 신는 신발을 카피해 신었고 그 신발을 ‘알키비아데스’라고 불렀다”고 한다. 웬만한 일반인들의 삶을 ‘서민들’의 것으로 비하하던 구준표처럼 알키비아데스는 피리 부는 모습이 사람을 우습게 만든다며 피리 부는 법을 배우지 않았고 “일부 레슬러들은 출신성분이 나쁘다(천민이다.)”라는 이유를 데며 아테네의 인기 스포츠였던 레슬링을 좋아하지 않았던 ‘폼생폼사’의 인물이었다.

여기에 학력면에선 드라마속 신화학원 보다 더 잘나가는 학력을 갖췄다고 할 수 있다.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가 아꼈던 제자로 소크라테스는 그의 의견을 높이 평가했고 실제 그의 조언을 수용했다. 그의 수학동문으로는 드라마속 ‘F4'처럼 역사가 크세노폰, 정치가 크리티아스, 철학자 플라톤이 있었다. 그는 플라톤의 ’향연‘이나 ’대화‘에도 등장하며 그의 이름을 딴 책도 있다.

그의 정치 인생도 탄탄대로였다. 초창기 사소한 실수는 그의 화려한 배경과 외모에 뭍혀 용서됐고 그는 쉬지않고 성공가도를 달렸다. 스파르타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를 주장하며 기원전 420년 장군으로 선출됐고, 아테네 시민들의 욕망과 허영심을 자극하며 시칠리아 원정이라는 정치적 ‘몰빵’을 이끌어 내게 된다. 시칠리아 원정에서 대승을 거두면 일확천금을 거둘것이란 희망에 부푼 아테네는 전 국력을 집중하다 시피해 대해군을 시칠리아로 보내게 된다. 당연히 이 대함대의 사령관으론 행운의 꽃미남 알키비아데스가 담당하게 됐다.

하지만 창창하던 알키비아데스의 인생은 이때부터 갖은 시련의 풍상을 겪게 된다. 대함대가 출항하기전 아테네 시에 있던 헤르메스상들이 집단으로 파괴되는 망칙한 일들이 발생하게 된다. 도시 곳곳에 있던 헤르메스상들의 얼굴이 박살나고 헤르메스상의 상징인 발기된 패니스는 뽑히고 부서지는 일들이 일어난 것. 아테네 시민들은 헤르메스신의 분노와 복수가 일어날 것을 두려워했고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가장 불길한 전조로 여겼다.

아테네 시민들은 이같은 흉측한 일의 책임을 물어 알키비아데스에 대한 소환령을 내리고 풍운아 알키비아데스는 적국인 스파르타로 망명하는 쇼킹한 대응을 하게 된다.

한편 알키비아데스 없이 시칠리아 원정을 감행한 아테네 함대는 시칠리아에서 거의 전멸되는 대몰락을 맞이하게 되고 (이때 알키비아데스가 없었다는 점은 후에 그가 아테네로 복귀하는 명분이 된다.) 아테네는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아테네의 전략 전술을 훤히 꾀고 있고 아테네의 약점을 모두 파악하고 있던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의 최고 지략가로서 아테네를 궁지에 몰아 넣게된다. 예일대 도널드 케이건 교수가 희대의 ‘배신자(turncoat)'라고 명명한 진가를 보이는 것. 이어 알키비아데스는 페르시아로 넘어가 페르시아와 스파르타의 동맹을 주선하며 아테네를 더욱 코너로 몰게 된다.

하지만 이때 알키비아데스의 ‘미모’와 ‘여성편력’이 또다시 그의 발목을 잡는 일이 발생한다. 바로 알키비아데스가 당시 스파르타의 왕이었던 아기스2세의 아내와 바람이 난 것. 신빙성은 떨어지지만 “스파르타의 왕이 전장에 나간동안 스파르타에서 지진이 발생했는데 지진이 나자 왕비의 침실에서 살려고 도망쳐 나온 남자가 있었는데 그가 알키비아데스였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실제 지진후 9개월후 스파르타 왕비는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는 후일 왕위계승권이 금지되게 된다.

스파르타 왕비와의 간통으로 사형판결을 받은 알키비아데스는 이번에는 페르시아로 망명하게 되고, 이후 아테네 일부 세력과 접촉 다시 아테네측에 합류하게 된다. 이번에는 스파르타의 전략,전술적 약점을 이용 아테네에 연승의 기운을 불러넣으며 헬레스폰트 해역의 제해권을 다시 아테네에게 돌려주게 된다.

이에 알키비아데스는 기원전 408년 아테네 시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귀국하지만 그의 행운은 여기까지였다. 스파르타가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아 세력을 만회했고 이는 알키비아데스의 재실각으로 이어졌다. 아테네와 스파르타에서 모두 버림받은 그는 이번에 페르시아로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나긴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는 결국 아테네를 격파했고 아테네가 패망한 뒤에도 스파르타는 그의 목숨을 끝까지 노렸다. 결국 그는 프리기아의 한 작은 마을에서 자객에 의해 살해되는 것으로 생을 마치게 된다.

서양사 최초의 꽃미남은 그 외모만큼이나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결국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그의 조국의 패망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동양사회에서 전통적으로 가장 꺼리는 것중 하나가 ‘소년등과’라고 하는데 너무 이른 나이에 큰 성공을 거두면 이를 자체적으로 감당하지 못해 결과적으로 실패로 이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알키비아데스는 재력과 가문, 정치력, 학력, 외모 어느것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F4'였고 이를 바탕으로 초창기부터 성공가도를 달렸지만 바로 이점이 그의 발목을 잡는 근원적인 이유가 됐다. 주어진 행운에 대해 언제나 감사하면서 언제나 겸손한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게 이 풍운아 꽃미남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가 아닐까.

<참고한 책>

Lucy Hughs-Hallett, Heroes- A History of Hero Worship, Anchorbooks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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