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문학평론가 유종호 전 연세대 석좌교수는 1951년 한국전쟁 때 17세 소년이었다. 반세기를 훌쩍 넘긴 후 당시를 복원해낸 회상록 《그 겨울 그리고 가을》(현대문학)에서 그는 문학소년의 눈에 비친 한국전쟁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엄동설한에 광목천의 배낭 하나를 달랑 메고 떠난 피난길에서 시작해 미군부대 노동사무소에서 일했던 경험을 거쳐 학교로 돌아오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고스란히 복원해 냈다.

그의 체험담은 문학평론가다운 유려한 문장으로 한편의 역사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피난을 떠난 당시 가족 중 어린애가 없어서 다행이겠다는 인사를 많이 들었다는 그는 '난리통에는 별 게 다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별것 아닌 것이 강제된 죽음의 사유가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전쟁에 휘말린 평범한 사람들의 고통을 간명하게 보여준다.

순결한 사랑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는 소년답게 노무자들의 음담패설을 '내가 좋아하고 숭상했던 삶과 문학에 대한 모독이나 폭행'이라고 느끼기도 한다.

전쟁통에도 문학을 향한 갈증을 접을 수 없었다는 고백도 여러 차례 나온다. 몇번 망설이다가 미군 부대에서 받은 돈으로 시집을 샀다는 그는 '물질적 궁핍과 문화적 갈증을 동시에 절감하고 있던 시절'이라고 그때를 기억한다. '책과 책방은 적지 않은 위로요 위안이었다.

그것은 캄캄한 전시상황에서 그나마 구원의 가능성을 보이며 가물거리는 등불이었다. 쑥대밭에 남아 있는 인색한 은총의 이삭이었다. 책에 얽힌 소소한 일이 기억에 소상히 남아 있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

이미 2004년 《나의 해방전후》라는 회상록을 통해 1941년부터 1949년까지 체험을 발표했던 유 전 교수는 이번 책에서도 놀라운 기억력을 보여준다. 그는 "충격적인 첫 경험이 많아 그 후에도 곰곰이 되씹는 등 내 나름으로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을 전개해왔다"고 설명했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