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미륵사는 그동안 신라의 선화 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인 서동 왕자가 왕(무왕)이 된 뒤 왕비를 위해 용화산 아래에 지었다고 전해져 왔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라 무왕과 함께 사자사로 가던 왕후가 용화산 아래 큰 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나자 수레를 멈추고 경건히 예를 올린 후 왕에게 그 자리에 절을 짓도록 간청해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것이다. 또 친정 아버지인 진평왕이 많은 공인을 보내 미륵사 창건을 도왔다고 한다.

그러나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금제 사리봉안기는 백제가 신라의 도움 없이 독자적인 기술로 대찰을 완성했음을 보여준다.

당시 미륵사 공사는 현재 남아있는 절터만 1338만여㎡에 달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 절 안에 세워진 석탑은 국내 최고 · 최대 규모를 자랑하며 국보 11호로 지정돼 있다.

이 탑은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충실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당시로선 혁신적인 성보(聖寶)였다.

이 석탑과 보물 제236호 미륵사지 당간지주 외에는 절터만 남아 있지만 건물터에선 백제와 고구려의 유구(遺構)가 복합돼 있어 미륵사는 삼국시대 말기의 건축 기술이 총망라된 보고로 평가된다.

여기에다 이번에 발견된 사리호 표면에서 확인된 다양한 문양과 정교한 세공 기법은 절정에 달한 백제 금속공예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어 그간 베일 속에 가려졌던 미륵사 창건의 비밀이 점차 드러날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