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을 해체 보수하던 중 석탑 1층 사리공(舍利孔)에서 금제 사리호와 사찰 · 석탑의 조성 내력을 알려 주는 사리 봉안기(奉安記) 등 국보급 유물이 다수 발견됐다.

이들 유물은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를 내용으로 하는 '서동요'가 허구일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어 주목된다.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는 미륵사지 석탑 1층 심주(心柱) 윗면 중앙에서 사리공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백제 왕실의 안녕을 위해 조성한 사리호와 사리봉안기,백제 특유의 은제 머리꽃 장식 등을 대량으로 수습했다고 19일 밝혔다.

◆국보급 유물 등 500여점 발굴

백제 사리장엄구가 발견된 것은 2007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부여 왕흥사지 목탑 터에서 발굴한 창왕(昌王) 시대(577년) 사리기에 이어 두 번째다.

사리공에서는 사리를 담은 금제 사리호(舍利壺)와 금판 양면에 미륵사 및 석탑 조성 내력을 적은 금제 사리봉안기,은제 관식(冠飾) 등 각종 유물 500여 점이 일괄 수습됐다.

이 중 금제 사리봉안기는 가로 15.5㎝,세로 10.5㎝ 크기의 금판 양면에 글자를 음각(陰刻)하고 글자마다 붉은 색을 칠한 것으로 앞면에는 1행 9글자씩 모두 11행 99자,뒷면에는 11행 94글자를 새겼다.

또 금제 사리호는 높이 13㎝,어깨 폭 7.7㎝의 작은 모양으로 보주형(寶柱形) 뚜껑을 덮었다. X선 투시 결과 사리호는 내함(內函)과 외함(外函)의 2중 구조로 돼 있으며 사리호 표면에서 다양한 문양과 세공(細工) 기법이 드러나 당시 백제 금속공예가 절정에 달했음을 입증했다.

이번 발견으로 백제 석탑의 사리봉안 기법과 의례가 새롭게 드러나고,공양품으로 함께 묻힌 은제 관식을 비롯한 유물들이 다량 확인돼 유사한 유물이 출토된 다른 백제 유적의 축조 시점을 밝히는 데에도 결정적인 단서가 될 전망이다.

연구소는 "미륵사의 창건 목적과 시주(施主),석탑의 건립 연대 등이 정확하게 드러났고 문헌의 부족함을 보완하는 것은 물론 이 시대 백제의 서체(書體)를 연구하는 데도 커다란 획을 긋게 됐다"면서 "특히 사리장엄구 발견은 무령왕릉 발굴과 부여 능산리 금동대향로 발견 이래 백제지역 최고의 고고학적 성과"라고 자평했다.

◆'서동요'는 그냥 설화일 뿐(?)

'선화 공주님은 남 몰래 밀어 두고(밀통하고) 서동을 몰래 밤에 안고 간다. '

백제의 제30대 무왕(武王 · 재위 600~641년)이 신라 제26대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善花) 공주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사모하던 끝에 경주에 가서 퍼뜨렸다는 '서동요(薯童謠)'다.

'서동'은 무왕의 어릴 때 이름으로 이 노래가 대궐 안에까지 퍼지자 왕은 공주를 귀양 보냈고 서동이 길목에서 기다리다 선화 공주를 데리고 백제로 돌아가 그는 임금이 되고 선화는 왕후가 되었다고 《삼국유사》 '무왕 조(條)'는 전한다.

'무왕 조'는 또 왕과 왕후가 사자사에 가다가 용화산 아래 큰 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나자 왕후의 요청으로 못을 메운 자리에 절을 지어 미륵사라 이름했다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이웃나라 왕과 공주의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설화로만 남을 가능성이 커졌다.

김상현 동국대 교수가 번역한 결과 봉안기는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에 선인(善因)을 심어…정재(淨財)를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시고,기해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라 무왕의 왕후는 선화 공주가 아니라 백제 귀족의 딸이며,미륵사지는 무왕과 선화 공주가 함께 지은 것이 아니라 왕후가 왕실의 안녕을 위해 재물을 보시하고 창건했음이 밝혀졌다. '사택'은 백제의 8대 성(姓) 가운데 하나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