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 소설가, 신작 소설집 '첫눈' … 6년만에 출간

중견소설가 이순원씨가 신작 소설집 《첫눈》(뿔)을 냈다. 소설집으로는 6년 만이다. 수록된 작품 7편에는 애틋한 감정이 일상에 마모되는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남녀,헌신하다 헌신짝 취급을 당하게 된 어머니,베트남에서 어린 신부를 사들이는 상황 등이 등장한다. 그는 이런 씁쓸한 현실을 목소리 높여 질타하는 대신 서정적 필치로 섬세하게 펼쳐보인다. 표제작 <첫눈>은 '그냥 봐선 온 지도 안 온 지도 잘 모르고,그렇지만 사람 마음 들뜨게 하는' 첫눈을 닮은 끌림을 느꼈지만 더 이상 감정을 불태우지 못하고 헤어진 남녀의 이야기다. 기러기 아빠인 프리랜서 PD는 울산의 한 고등학교에 강연을 하러 갔다가 남편과 사별한 여교사를 만나게 된다. 이들은 몇번 만남을 이어가다가 바쁜 일상에 쫓기다 보니 '서로 무심하게 보낸 시간이 너무 긴 듯해 이쪽에서든 저쪽에서든 다시 전화조차 하기 서먹하게 되어버리고 만' 관계로 끝나고 만다. 첫 만남에서 나누었던 "어른이 되고나면 그런 신화들도 조금은 쓸쓸해지기 마련이죠.현실이 월광을 벗겨내기 시작하면…"이라는 대화가 이들의 결말을 암시했듯이.그렇게 첫눈같은 감정은 함박눈이 되지 못한 채 막을 내리고,PD는 '찍으면 발자국 자리도 안 나게 내렸는지 안 내렸는지도 모르게 왔다 가는 것,혹은 그렇게 왔다 가는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

자식을 위해 희생만 한 어머니의 초상을 세밀하게 그린 <거미의 집>에서 아내는 시어머니 부양을 지긋지긋해하다 가족 회의를 소집해 부양 의무를 다른 친척에게 떠넘기려 한다. 그러면서도 막상 아이들에게는 어릴 때부터 "너희들은 이 다음 우리와 함께 살아야 한다"고 오금을 박는 아내,남편은 그런 아내를 혐오하면서도 방관자처럼 군다.

"내가 너무 오래 산다"고 말하는 어머니를 보며 '바글바글한 새끼들이 파먹고 살아 껍질만 남은' 죽은 거미를 떠올릴 뿐이다. 혀로 날카롭게 날을 세우며 어머니 부양 의무를 탁구공인 양 상대방에게 이리저리 퉁퉁 튕겨내는 자식들과 며느리의 말다툼을 엿듣는 어머니.어머니는 '새끼들에게 파먹일 것 다 파먹이고 나면 거미도 스스로 줄에 목을 걸지 않던가'라고 생각하며 진작에 스스로라도 명줄을 끊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돈으로 베트남에서 어린 신부를 데려오는 국제결혼의 현실 앞에서 느끼는 부끄러움과 몰염치를 해부한 단편 <미안해요,호 아저씨>도 인상적이다. 초등학교 동문회에 참석하기 위해 고향에 내려간 '나'와 친구들의 화제는 단연 갓 소녀티를 벗은 어린 베트남 여자를 세번째 신부로 맞는 고향 후배 이야기다. 장애인 동생을 둔 동창은 비상한 관심을 보이며 눈을 반짝이지만,'나'는 베트남 처녀와의 결혼을 알선하는 업체에서 걸어둔 현수막에 적힌 '절대 도망가지 않습니다?j?j'라는 문구를 보고 경악한다. 월남전에서 고엽제를 뿌려댔던 나라에서 단돈 몇푼으로 베트남 처녀를 사오는 현실을 아프게 씹으면서 '나'는 대통령이 된 다음에도 관저 전기 기술자의 단칸방에 기거했다는 호찌민에게 대신 마음으로 사죄한다.

이외에도 독일로 파견된 광부의 이야기를 다룬 <라인 강가에서>,친자식도 아닌 '나'의 몫으로 떠놓은 정화수만으로도 우물 하나를 채울 정도였던 대모의 살뜰한 사랑을 그린 <멀리 있는 사람> 등이 실렸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