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제이 쿨드 지음│홍욱희ㆍ홍동선 옮김│사이언스 옮김│431쪽│2만원

출판사 편집자들 사이에서는 '저자의 첫 책을 잡아라'는 속설이 있다. 될 성부른 저자의 첫 작품에는 그의 모든 것이 들어 있기 때문이란다. 처음을 가짐으로써 모든 것을 갖고자 하는 편집자의 욕망과 로망이 담긴 말이다. 하지만 저자들은 대개 첫 작품에서 모든 것을 다 말하려 하지 않는다. 한 번으로 자신의 인생을 다 평가 받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 하버드대학의 생물학자이며 퓰리처상을 두 번씩이나 받은 에드워드 윌슨의 경우에도 그의 출세작 《사회생물학》은 처녀작이 아니었다. 150년 전 세상을 한바탕 뒤흔든 다윈은 어떤가? 그의 대표작 《종의 기원》은 50세에 이룬 인생의 13번째 책이다.

반면 처녀작이 대표작이며 최고의 흥행작이 된 사례도 없진 않다. 1997년 혜성처럼 등장해 전 세계의 독자들을 마법에 빠뜨린 조앤 K 롤링에게 《해리포터》 시리즈가 그렇고,그 아성을 깨고 독자들을 뱀파이어와의 사랑에 빠뜨린 스테프니 메이어의 《트와일라잇》 시리즈도 그런 경우다. 이제 우리들에게 너무나 친숙해진 옥스퍼드대학의 동물행동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도 편집자의 로망이 현실이 된 경우이다. 《확장된 표현형》에서 최근의 《만들어진 신》에 이르기까지 도발적 화두를 던졌던 그의 모든 논리가 첫 책 안에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하버드대학의 고생물학자로서 지난 30여년 동안 도킨스와 더불어 현대 진화생물학의 양대 산맥을 형성했던 고(故) 스티븐 제이 굴드의 《다윈 이후》도 꼭 그런 책이다. 2002년 61세에 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그가 세상에 내놓은 저서 22권을 자세히 보면 모두가 이 첫 책에서 갈라져 나온 가지들이다. 말하자면 이 책은 《풀하우스》 《생명,그 경이로움에 대하여》 《판다의 엄지》와 같은 그의 대표작들의 공통 조상인 셈이다.

과학의 엔진은 논쟁이다. 현대 진화론이 오늘날 이렇게까지 우리 삶에 깊숙이 들어온 원동력은 진화론자들 간의 치열한 공방 때문이다. 세심한 독자라면 그 치열한 논쟁의 한 축에 굴드가 서 있다는 사실쯤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반대편에는 최근에 더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도킨스가 버티고 있다. 굴드의 사망으로 이 둘 간의 라이벌 전은 아쉽게 끝나고 말았지만,도킨스파와 굴드파의 치고받는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과학의 진짜 논쟁이다. '진화론 논쟁'이라고 하면 흔히들 '창조-진화 논쟁'을 떠올리고,거기에 대단한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떠들지만 실상은 사이비 논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30년 전쯤,현대 진화론 논쟁의 빅매치에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1976년)를 굴드는 《다윈 이후》(1977년)를 꺼내들었다. 다윈 진화론의 배경,의미,함의 등을 다룬 철학적 · 역사적 부분,캄브리아기 대번성과 페름기 대멸종을 다룬 고생물학 라운드에서는 굴드의 손이 올라갈 만하다.

두 책만을 놓고 봤을 때 도발적 측면에서는 도킨스가 압권이지만 박식과 재치,분석 면에서는 굴드가 분명 한 수 위다. 굴드라는 라이벌이 있었기에 도킨스도 자신의 인문사회학적 지식을 격상시키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혹시 《다윈 이후》를 집어들고 '에이 30년 전에 나온 책이잖아'라며 그냥 내려놓는 독자들이 없길 바란다. 출간 30주년이 지난 지금도 《이기적 유전자》가 독자들을 흥분시키며 과학교양서의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고 있다면,굴드의 이 책도 충분히 그 자리에 있을 만하기 때문이다. 만일 외계인 학자가 내게 와서 '굴드의 책 중 단 한 권만을 외계 도서관에 비치할 테니 말해보라'고 한다면,솔직히 나는 몇 권을 놓고 고민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다시 '도킨스 책 중에는 《이기적 유전자》를 가져가기로 했다'고 거든다면,난 더 이상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올해는 다윈 탄생 200돌,《종의 기원》 출간 150주년이기에 전 세계에서 진화론 열풍이 불고 있다. 다윈 진화론의 의미와 함의,재미까지 선사하는 굴드표 진화론의 맛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장대익 동덕여대 교양교직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