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즈칸의 말발굽 뒤에는 카라부란이 일었다. 카라부란은 대낮에도 천지분간을 못할 정도로 거칠게 휘몰아치는 사막의 모래폭풍.그것은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낸 채 살아움직이는 공포였다. 먹잇감을 향해 달려드는 냉혈 늑대의 거친 콧김과 핏빛 절멸의 전조가 뒤엉켜 있었다. 칭기즈칸의 카라부란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시체가 산을 이루었고 정착문화의 외적 흔적까지 모조리 불타 부서졌다.

서역의 실크로드 중심부를 장악했던 코라즘제국의 부하라도 1220년 그 검은 공포와 맞닥뜨렸다. 1215년 금나라의 중도(베이징)까지 밀고 들어가는 등 1차 원정에 나선 칭기즈칸이 한반도보다 넓은 붉은 모래의 키질쿰사막을 건너 부하라에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정복자 칭기즈칸은 부하라의 이맘에게 이렇게 물었다. "전체 우주가 신의 집이다. 특별히 그 중 한 곳을 지정해서 거기에 참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 신전을 가지지 않았고,신상의 형태로 표현되지도 않았던 신 '텡그리'를 생활속에 둔 초원 유목민의 눈에는 형상화된 신만큼 부질없는 것도 없었다. 모든 게 파괴됐다. 코란은 발로 차였고,커다란 목조 사원은 불길에 휩싸였다. 그 자리에서 살해된 800명 아이들의 시체도 끔찍했다. 딱 하나만 예외였다. 바로 칼란 미나렛이다.


■오아시스비단길의 등대

칼란 미나렛은 이름 그대로 '커다란(칼란) 첨탑(미나렛)'.중아아시아 최대의 이슬람 첨탑이다. 1127년 원래 있던 것을 허물고 새로 쌓은 칼란 미나렛은 당시 중앙아시아 오아시스비단길의 랜드마크 격이었다. 땅속 10m 깊이에 뿌리를 박은 첨탑은 기단부 지름 9m,높이는 47m에 이른다. 원통형의 탑신은 흙벽돌로 띠를 둘러 치장했고 꼭대기에는 빙둘러 16개의 등화창이 나 있다. 칼란 미나렛은 그 당당한 모습에 여성미가 녹아 있다. 체스판의 몸매 좋은 퀸을 빼닮았다. 첨탑은 하루 다섯 차례 정해진 시간에 아잔(이슬람 예배시간을 알리는 소리)이 울려퍼지던 곳이었다. 당시 비단길을 오가던 대상들에게는 희망의 등대이기도 했다.

부하라는 1만㎞에 달했던 비단길 위의 오아시스 도시.비단길은 기원전 2세기 전한 무제 때 장건의 13년에 걸친 서역착공(西域鑿空)으로 뚫린 동서양 교역의 대동맥이다. 천산산맥을 중심으로 한 천산북로와 천산남로가 이곳 부하라와 사마르칸트에서 만나 로마로 향했으니 부하라 일대가 오아시스비단길의 딱 중간인 셈이다. 낙타 200∼300마리를 끌고 하루 6시간,30∼40㎞씩 수개월을 걸어온 대상이 그 고단한 여정의 한밤중에 칼란 미나렛 꼭대기에서 타오르는 등대불을 본 순간의 기분은 어땠을까.

이 칼란 미나렛이 칭기즈칸의 말발굽에 짓밟히지 않은 것은 순전히 그 높이와 바람 덕이었다는 게 40년 가이드 생활로 잔뼈가 굵은 일콤의 설명이다.

"부하라를 점령한 칭기즈칸은 칼란 미나렛 바로 옆의 칼란 사원에서 승리의 축배를 들었어요. 술기운이 오른 칭기즈칸은 말에 올라 칼란 미나렛 앞에 서 고개를 젖혀 탑머리를 응시했습니다. 그때 한줄기 바람이 불었고 쓰고 있던 투구가 땅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

말에서 내려 투구를 집어들기 위해 허리를 숙인 칭기즈칸은 불길한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내가 칭기즈칸이다.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아직 누구 앞에서도 투구를 벗지 않았고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다. 여기 이 미나렛은 영험한 것이다. 건드리지 말고 그냥 놔둬라."

칼란 미나렛은 안쪽 나선형 계단을 따라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다. 청옥색의 돔과 낮게 엎드린 흙벽돌 집들이 가득한 부하라 시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수도원'이란 뜻의 도시

칼란 미나렛과 짧은 다리로 연결된 칼란 사원은 중앙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이슬람 사원이다. 가로 178m,세로 78m의 중정은 1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는 것을 대비해 출입문도 7개나 두었다. 이 자리에는 8세기 초부터 사원이 있었다고 한다. 칭기즈칸에게 점령당하기 바로 전에는 목조 사원이었다. 파란 하늘보다 더 파란 두 개의 청옥빛 돔이 우뚝한 지금 사원은 1541년 건축된 것이다. 칼란 미나렛이 있는 동문쪽에서 보면 중정 맨 끝에 작은 사원 모양의 탑비가 서 있다. 칭기즈칸이 부하라 정복 당시 800명의 아이들을 학살한 자리라고 한다. 벽면 회랑을 따라 왼쪽으로 가면 우물자리를 볼 수 있다. 6년이 지나면 1300년이 되는,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우물이라고 일콤은 설명했다.



우주베키스탄 부하라

잿빗 벽돌의 건축미…마법으로 깨운 샘물…'비단길 보석'

칼란 사원 맞은편에 미르 아랍 메드레세(신학교)가 있다. 칭기즈칸에 이은 15세기의 정복자 티무르 시대에 지어진 메드레세로 지금의 대학격인 곳이다. 출입문의 청백색 모자이크 타일 장식이 눈부시다. 우즈베키스탄에는 이런 메드레세가 아홉 개 있다. 1층은 공부방이며 2층은 기숙사로 꾸며져 있다. 1년 학비는 300달러,점심 저녁은 공짜라고 한다. 주로 러시아어와 아랍어를 배운다. 옛 소련 시절에는 이런 메드레세가 이곳 한 군데뿐이어서 중앙아시아지역의 젊은이들이 많이 몰렸다고 한다. 메드레세 광장 맞은편의 차시마이 미롭 식당 3층 옥상에 자리를 잡으면 칼란 미나렛을 포함한 사원과 메드레세 전경이 한눈에 보인다.

중앙아시아 최고(最古)의 건축물

칼란 미나렛과 함께 칭기즈칸의 말발굽에 짓밟히지 않은 유적이 하나 더 있기는 하다. 바로 이스마일 샤마니 묘다. 놀이시설이 있는 샤마니 공원 한복판에 덩그러니 서 있는 이스마일 샤마니 묘는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이스마일 샤마니는 9∼10세기 부하라 왕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인물.이슬람 최고의 종교학자인 이맘 부하리와 이슬람 및 유럽의학의 기초를 닦은 이븐 시나,그리고 대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알 콰리즈미 등이 이 시기 부하라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이스마일 샤마니 묘는 이스마일 샤마니가 선친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었는데 그와 그의 아들까지 묻힌 가족 묘당이 되었다. 묘는 무척 수수하지만 성스러운 분위기가 가득하다. 사방이 똑같은 직육면체의 외벽 두께는 2m.색벽돌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18종류의 잿빛 구운 벽돌로만 기하학적 무늬를 만들었다. 4개의 격자무늬 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만으로 내부의 색조가 때론 황금빛으로,때론 갈색으로 변한다.

차슈마 아윱도 빼놓을 수 없다. 차슈마는 '샘',아윱은 구약성서 욥기의 주인공인 '욥'이란 인물로 '욥의 샘물'이란 뜻이다. 욥은 자식과 재산을 모두 잃는 시련 속에서도 기독교 신앙을 지킨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네 시작은 미미하였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란 구절로 친숙하다. 차슈마 아윱은 이 욥이 가뭄에 시달리던 주민을 위해 마법의 지팡이를 두드려 솟게 한 샘이라고 한다. 내부는 단출하다. 두 길 깊이의 작은 샘이 하나 있는데 아직도 마실 수 있는 물이 샘솟는다. 이 샘에서 물을 길어 가정에 배달해주던 물장수 그림이 걸려 있다. 100여년 전에 100개를 헤아렸다는 남자찜질방의 지도도 볼 수 있다.

■2400년 전의 고성

차슈마 아윱에서 청동 세공품 등 기념품을 파는 노점이 있는 산책로를 빠져 나가면 작은 미나렛과 함께 볼로 하우즈(연못)사원이 나온다. 호두나무와 뽕나무로 된 12m 높이의 기둥 20개가 전면 지붕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 여느 사원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이슬람 사원이 아니라 중국의 어느 큰 사찰 법당 같은 느낌이다. 이 사원 앞길 건너편에 아르크 성이 자리해 있다. 2400년 전부터 있어온 성으로 옛 부하라 왕들이 거주하던 곳이다. 800m 길이의 성벽이 16∼20m 높이로 둘러쳐져 있다.

18세기에 복원됐다는 성벽 앞의 레기스탄 광장이 널찍하다. 나라의 큰 행사가 거행됐으며 범죄자를 공개 처형하던 곳이라고도 한다. 왕이 앉아 그 모든 대소사를 지켜봤던 옥좌가 성문 오른편 성벽 위에 있다. 하나만 남아 있는 성문 너머의 터널 같은 길 반두스 양편에 죄수들을 가두던 좁은 암굴방이 붙어 있다. 일부 암굴방은 기념품 상점으로 활용되고 있다. 반두스를 지나 오른편으로 꺾어 들어가면 왼쪽에 사원이 보인다. 가이드 일콤은 "성 안에는 세 개의 사원이 있었는데 1920년 혁명 때 이 사원만 살아남았다"며 "100% 오리지널 이슬람 사원"이라고 강조했다. 사원 안은 메카 방향을 향해 아치형으로 움푹 파인 기도처인 미흐랍과 설교대인 민바르 외에 아무런 특이한 장식 없은 회벽으로 마감돼 있다. 장식이 없는 것은 기도할 때 정신을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사원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꺾어 올라가면 제법 널찍한 중정이 나온다. 부하라의 왕들이 외국의 사신을 맞이하고 정무도 보았던 곳이다. 부하라 왕의 곤룡포 차림에 왕검도 들고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다. 그 옆 박물관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기원전의 토기,부하라 유리,왕의 복식과 일반 주민들의 옷,아주 커다란 사마바르 차 용기,어린이들이 메드레세에 가기 위해 들고 배웠던 작은 코란 등 갖가지 유물을 볼 수 있다. 현세를 포기하고 그 무의미함의 체득을 극한까지 추구했던 수피들의 옷과 일반인들의 장묘 풍습,혁명 때의 포탄 자국이 선명한 칼란 미나렛의 모습 등도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다.

■대상들의 잔영이 짙은 시장통

옛날 부하라는 오아시스 도시답게 집집이 우물을 두었다고 한다. 우물이 없는 집은 하우즈(연못)에서 물을 길어 썼다. 부하라 일대에는 이 하우즈가 100여개 있었는데 이슬람 세계의 전설적 시인 호쟈 나스리진의 우스꽝스러운 동상이 있는 라비 하우즈가 유명하다. 이 연못 주변에 500살이 넘은 뽕나무 고사목 세 그루가 있다. 라비 하우즈 옆 나디르 디반비기 메드레세의 정문 장식이 눈에 띈다. 17세기에 지은 메드레세인데 정문 윗부분에 이슬람 전설상의 행복새 '세무르'가 날개짓을 하고 있다. 메드레세의 안은 인형공방,청동세공품,코란 책받침,옷가지 등의 기념품을 파는 작은 가게들이 들어서 있다. 저녁에는 이슬람 전통공연과 패션쇼를 겸한 레스토랑으로 변한다.

라비 하우즈를 중심으로 디반비기 메드레세 맞은편에 호나코가 보인다. 일보다 기도와 수행을 중시했던 수피들과 거지나 다름없었던 데르비시들을 위한 숙소였다고 한다. 이 호나코 옆으로 이어진 좁은 시장통이 부하라 구시가의 명동격으로,옛날 대상들의 잔영이 가장 짙게 남아 있는 곳이다.

시장통은 작은 사거리마다 돔지붕이 있는 재래시장 '굼바스'가 있다. 이 굼바스는 좁은 골목길로 서로 연결돼 있어 어느 방향에서 오든 지나치도록 되어 있다. 항상 배꼽 위에 두도록 높이가 조절되는 코란 책받침 '라우크',신기한 담배통과 연필통 등의 실용 목공예품,가위며 칼 등의 쇠붙이,실크제품과 카펫,모자와 금속 장신구 등의 판매점이 줄지어 있다. 그 한 골목의 남자공중욕탕 '하몸'이 눈에 띈다. 416년,그러니까 15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라고 한다. 뜨거운 증기탕 속의 대리석 좌대에 누워 마사지를 받으며 여행길의 피로를 풀 수 있어 좋다.

골목길 끝의 마고키 아타리 사원은 부하라의 역사 교과서와 같은 사원.불교와 조로아스터교,이슬람교 등 시대별 부하라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던 종교 유적이 한 장소의 각기 다른 지층에서 발굴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부하라(우즈베키스탄)=글/사진 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