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쇼스키 감독 영화 '스피드 레이서' 조연

"마이너리그 주전보다는 메이저리그에서 주전이 되고 싶어하는 선수로 봐주십시오."

가수 비, 연기자 정지훈이 'RAIN'이라는 이름으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도전했다.

'매트릭스'의 워쇼스키 형제 감독이 각본, 연출, 제작을 맡은 '스피드 레이서'(5월8일 전 세계 동시 개봉)다.

'스피드 레이서'에서 그는 주인공 스피드(에밀 허시 분)와 함께 레이싱 승부를 조작하려는 세력과 맞서 싸우는 태조 토고칸으로 등장한다.

기업의 후계자로서 선대가 일군 기업을 지키려는 태조 토고칸은 근성과 카리스마를 갖고 있는 인물. 정지훈은 꽤 많은 분량에 출연하고 내용상 큰 의미를 지닌 캐릭터를 연기하며 팬들을 즐겁게 한다.

가수일 때는 비, 드라마 '상두야 학교 가자'와 영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이후 연기자로서는 정지훈으로 활동했던 그는 이번에 'RAIN'으로 타이틀이 박혀 있는데 어찌 불러야 하느냐는 질문에 "제작자가 정지훈보다는 비(RAIN)가 외국 시장에서 더 친숙한 이름이 될 것 같아 'RAIN'으로 썼지만 한국에선 연기자니까 정지훈으로 써달라"고 답했다.

영화 촬영 내내 "기죽지 않으려고 노려했다"는 정지훈은 전 세계 시장을 겨냥해 만드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참여하며 보고 배우고 느낀 게 많았던 듯 21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쉴새없이 의미 있는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진행될지 모르지만 성공한다는 전제 하에 '스피드 레이서' 3편까지 계약했다"는 사실을 처음 털어놓기도 했다.

다음은 정지훈과의 일문일답.

--영화를 보고 개인적으로 만족했나.

▲영화 팬이라면 누구나 그랬겠지만 '매트릭스' 시리즈를 보고 난 후 워쇼스키 감독에게 미쳤다.

액션 영화이길 바랐는데 자동차 싸움 영화라 해서 도저히 감이 안왔다.

그런데 워쇼스키 감독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더라. 그 문장은 그들이 스스로를 대변하는 말인 듯하다(웃음).

--어쨌든 조연이다. 조연임에도 택한 이유는.

▲미국에서 주연 제의는 심심찮게 있었다.

하지만 야구로 표현하자면, 마이너리그에서 주전보다는 메이저리그에서 주전이 되고 싶어하는 선수로 보이고 싶다.

감독이 워쇼스키 감독이잖나.

대단히 좋았고, 배울 수 있고,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정말 열심히 했더니 '스피드 레이서'를 찍으면서 감독님이 '닌자 어새신' 주연을 제의하셨다.

워쇼스키 감독은 '매트릭스'가 서양의 액션영화라면 동양의 무술영화를 만들고 싶어하셨다.

어렸을 때 태권도와 합기도를 조금 배운 덕에 이번 영화에서 돌려차기를 30분 만에 배워 해냈더니 눈여겨보셨나 보다.

또 경주 장면을 찍을 때는 운전대만 있는 그린 스크린에서 연기를 해야 했다.

가죽 수트까지 입어야 해 체감온도가 30도 이상이었는데도 다른 배우들이 쉴 때 쉬지 않고 찍었다.

한국인이 끈기와 인내가 뛰어나고 한국인은 다르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닌자 어새신'은 28일 촬영을 시작한다.

또 밥 먹을 때도 스태프들과 늘 함께 있었다.

밥 먹으면서 한글을 써 보여주며 '멋있지 않느냐'고 자랑했다.

그랬더니 '태조 토고칸'이라는 한글이 들어가게 됐다.

--워쇼스키 감독의 연기 지도는 어땠나.

▲래리는 디테일하게 잡아내는 편이고, 앤디는 전체적인 틀에서 연기를 본다.

제작비 빵빵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답게 모니터를 큰 스크린과 세 대의 TV 화면으로 했는데 둘이 서로 이야기하며 잡아내니까 서로의 장점을 살리게 되는 것 같다.

--영어 대사가 능숙하게 처리됐다. 영어로 연기하는 건 어땠나.

▲내가 미국 영화를 찍고, 미국에서 음반을 내게 될지 어떻게 알았나.

이럴 줄 알았으면 고등학교 때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두는 건데(웃음). 무엇보다 자신 있게 하려고 했다.

어차피 난 한국 사람이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네이티브 스피커는 아니지 않나.

회화 코치가 영국 분이어서 영국식 발음을 들려줘 고생하기도 했지만 자연스럽게 하려고 노력했다.

발음이 크게 어색하지 않아 다행이다(정지훈의 영어 발음은 꽤 매끄러웠다).

--캐릭터가 너무 한 가지 감정만 분출한다는 지적과 생각 이상으로 많이, 중요한 배역으로 출연했다는 칭찬이 있다.

▲감독님이 디테일하게 주문하는 편인데 내겐 또 다른 신비주의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 밝혀도 되나 모르겠는데 성공한다는 전제로 3편까지 계약했다.

('스피드 레이서' 1편) 이후의 상황을 자세히 말씀해주진 않았지만 뭔가 있는 것 같았다.

감독님은 내게 자동차회사 회장이니 굉장히 무게 있고 카리스마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목소리도 한 톤씩 낮추게 했다.

굉장히 시크하고 다크하게 보여야 한다고 했다.

내가 좀 더 웃고 밝게 보이려면 그걸 자제시켰다.

영화를 촬영하며 정말이지 불만은 전혀 없었다.

열심히 해서인지 나중에는 시나리오상 내가 없는 장면에서도 '레인, 좀 나와줘야겠어'라는 말을 해 촬영을 더하기도 했다.

--할리우드 제작 환경은 어땠나.

▲절대적으로 자본이 뒷받침된 최강의 스태프다.

한국은 비싼 장비를 들여 찍으려면 빌려서 해야 하니까 반드시 기한 내에 찍어야 하는데 여기는 아예 그 비싼 세트장을 지어버리더라. 거의 장면마다 카메라가 4대 이상 돌아가고, 첨단 카메라가 알아서 동선을 따라간다.

한국 감독님들 얼마나 능력 나.

그런 분들이 이런 장비와 여건 아래서 찍는다면 얼마나 좋겠나.

--에밀 허시, 매튜 폭스, 수전 서랜든, 존 굿맨 등 쟁쟁한 할리우드 스타들과 함께 작업한 소감은.

▲처음엔 딱 한 가지였다.

절대 기죽지 말자(웃음). 얼마나 유명한 분들인가.

특히 수전 서랜든은 내가 어려서부터 팬이었다.

그런 수전이 내 CD에 사인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수전도 내게 편지를 써줬다.

'이번 영화가 성공의 첫걸음이길 바란다'고 써있었다.

어느 날 한 배우의 생일이었는데 수전, 매튜, 에밀 등이 다 같이 저녁 먹고 볼링장에 갔다.

기죽지 말자고 했는데 너무나 열려 있는 배우들이었다.

또 아시아 팬들이 열정적이지 않나.

내 팬들이 베를린 촬영장까지 찾아와줬다.

어느 배우도 그런 팬은 없었다.

참. '트랜스포머'의 마이클 베이 감독도 촬영장에 와 만난 적이 있다.

'트랜스포머'가 한국에서 크게 히트해서인지 한국을 정말 좋아했고, 한국시장을 중요하고 생각하고 있더라. 대세는 이제 한국이다.

--영화 속 이름이 '태조 토고칸'이다. 그는 한국인인가, 일본인인가.

▲태조는 한국 이름 맞다.

감독께 물어보니 '태조'가 왕이라는 걸 알고 있더라. 또 '칸'은 몽골의 왕이잖나.

토고는 그냥 붙인 것 같고. 태조는 한국 이름인데, 극중 아버지 아름은 중국계라는 생각이 든다.

워쇼스키 감독은 '전 세계는 하나'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평화주의자다.

영화에서도 각 인종의 아나운서들이 각기 중계를 하지 않나.

한글을 써넣는 등 내가 한국적인 걸 더 고집했다.

--가수, 배우로 활동하고 있는데 본인이 생각하기에 자신의 가치를 진정으로 발휘하는 분야는 무엇인가.

▲우선 난 운이 좋은 것 같다.

월드 투어 중 오디션 제안을 받고 고민했다.

15시간 비행기 타고 날아가서 2시간 오디션 보는 데다 붙을지도 모르는 일이어서 '차라리 공연 연습을 더 할까'라고. 그런데 생각해보니 감독이 워쇼스키 아닌가.

내가 안 했는데 영화가 잘되면 너무 배가 아플 것 같았다(웃음). 그래서 내 손으로 자료 다 싸들고 갔다.

아는 단어 총동원해가며 나에 대해 설명했다.

그런데 지금은 영어 앨범 작업을 뒤로 미루면서 '닌자 어새신'의 주인공이 됐다.

어느 누가 봐도 워쇼스키 감독 영화에 주연으로 선다는 건 영광이지 않나.

일단 앨범을 미루고 영화에 올인하기로 했다.

영화로 얼굴을 알리고 나면 영어 앨범 작업하는 데 너 나을 것이라 본다.

윌리엄 모리스라는 에이전트에 내 전담반만 10명이 있다.

--아시아에서 인기 있는 가수 비의 캐스팅이 아시아 시장을 위한 지역안배로 볼 수도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올바른 판단이라고 본다.

이젠 아시아, 한국을 배제해서는 안된다.

아시아 시장에 치중해야 하는 게 맞고, 아시아에서 인기 있는 사람을 쓰는 게 맞다.

예전에는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잘생긴 미국내 아시안을 썼지만 이젠 아시아 사람을 쓴다.

또 예전에는 아시아인 배역에 일본 배우, 중국 배우를 썼는데 이젠 한국 배우를 쓴다.

나 역시 미국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 가수, 우리 배우 사진을 보여주고 소개한다.

한국 배우, 가수가 잘돼야 또 내가 일할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향수병은 없었나.

▲음식도 입에 맞지 않아 고생할 때는 때론 '편하게 살 수 있는데 왜 내가 이리 사서 고생할까'라는 생각도 한다.

그런데 내가 내 몸을 못 말리는 것 같다.

계속 미국에 욕심이 생기는 건 배꼽에 힘 딱 주고 내 자신한테 싸움을 거는 것 같다.

아마 어머니가 돈 없어 돌아가셨던 경험 때문인 것 같다.

어머니에 비하면 내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다.

--한국 작품은 언제 할 건가.

▲7월 말까지 '닌자 어새신' 촬영을 마치고 난 후 가을에는 아시아 팬들을 위해 특별 앨범을 만들 계획이다.

홍보를 위해 한국을 비롯해 일본, 홍콩, 대만 등에서 한 달씩 머문다.

그리고 영어 앨범 작업을 해야 해 한국 작품은 내년쯤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서울연합뉴스) 김가희 기자 kahe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