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키에 부리부리한 눈,긴 머리를 뒤로 묶은 채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고전과 철학 얘기.'구름 위에서 장풍이라도 쓸 법한' 그의 입에선 영어가 수시로 튀어나온다.

전공인 유불선(儒佛仙)은 물론 철학과 신학까지 넘나든다.

삶의 이력도 특이하다.

중학교 때 달마대사의 '역근경(易筋經)'을 배우며 소림 내공법을 익혔고,노자와 장자를 수차례 독학했다.

고교 땐 김추당(金秋堂) 선생을 만나 전진도(全眞道) 남종(南宗)의 단법(丹法)을 전해 받았고 동국대에서 불교학,서강대에서 종교학을 전공했다.

군 시절부터 익힌 영어는 영자신문에서 토플 전임강사를 지낸 실력이다.

서화담-이토정-송화산-송을산-김추당으로 내려오는 도학의 계보를 이었다는 이둔(理屯) 박태섭씨(49).

소설 '기문둔갑'의 저자이며 유불선 경전탐구 이력 30년의 박씨가 7년간의 각고 끝에 중국 명대(明代) 고승 지욱 선사(智旭·1599~1655)의 저술 '주역선해(周易禪解)'(도서출판 한강수,7만5000원)를 번역·주석해냈다.

944쪽 분량의 '주역선해'는 글자 그대로 주역을 불교의 입장에서 해석한 책이다.

저자는 "불교의 깨달음과 주역의 우주원리는 서로 통한다"며 "부처의 눈으로 주역의 도(道)를 읽고 주역의 눈으로 부처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지혜가 '주역선해(周易禪解)'에 담겨 있다"고 설명한다.

"주역은 유가의 모든 정신이 집중·용해돼 있는 최고의 경전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선 주역의 본격적인 해설서도 없이 조선 말까지 신흥종교의 이념을 뒷받침하기 위한 도참사상이나 운명을 점치는 점술서 정도로 다뤄왔지요.

사상적 종주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중국이 경학(經學) 전수를 꺼렸기 때문에 우리 유학자들은 경학에는 본격적으로 손도 대지 못하고 예학(禮學)에 매달렸던 것이죠."

중국 불교를 체계화한 교학 중심의 천태종 입장에서 주역을 해석한 '주역선해' 역시 그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

탄허 스님(1913~1983년)이 전문용어를 그대로 둔 채 한문투로 번역한 것이 있지만 일반인이 읽기엔 너무 어렵다는 것.

박씨는 "점치는 도구가 아니라 해탈의 도,인격수양의 길로 주역의 이해 차원을 높이고,천태사상의 핵심을 전하는 한편 유가의 입장에서 불교로 들어오는 다리를 놓고 불교를 아는 사람이 주역을 이해할 수 있도록 이 책을 번역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불교의 입장에서 해석한 '주역'은 어떻게 다를까.

"주역은 현세적·도덕적 삶을 가르치는 '땅의 경전'이지만 '주역선해'는 현세의 삶을 영원의 삶으로,순간을 영겁의 시간과 무한의 세계로 확장할 수 있도록 시선을 넓혀주는 책입니다.

영원에 시선을 둔 자만이 해탈로 가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박씨는 "역(易)은 끝없이 변해가는 것을 뜻하므로 생년일시로 정해진 운명은 없다"면서 "주역은 고요히 마음을 비우고 우주자연과 감응하며 한 마음이 되는 길"이라며 "탐욕을 버리고 마음의 공간을 텅 비우면 그 빈 공간에 우주가 들어와 마음이 우주의 파동과 공명한다"고 설명한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