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안철수연구소 이사회 의장

의대 교수에서 벤처기업 경영자로

내가 컴퓨터 바이러스를 퇴치할 수 있는 백신 프로그램을 처음 만든 것은 의과대학 박사과정에 있던 1988년이다. 전공이 환자 진료보다는 실험, 연구 방면이었기 때문에 전공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 나가기 위해 컴퓨터를 배웠는데, 단지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프로그램 언어를 배우고 있던 터였다.

세계 최초의 컴퓨터 바이러스 '브레인'에 감염되는 일을 당한 후 이것을 퇴치하는 프로그램 'Vaccine'을 만들어 무상 제공한 것이 인생 진로를 바꾸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컴퓨터가 감염되었을 정도로 피해가 컸음에도 컴퓨터 바이러스에 대한 대비책이 전무한 실정이어서 ‘Vaccine’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이후 계속 발견되는 신종 바이러스는 모두 나에게 해결 요청이 들어오게 되었다. 사명감도 들었고 보람도 느꼈기 때문에 매일 새벽 세 시에 일어나서 새벽 여섯 시까지 백신 프로그램을 만들고, 출근해서는 하루 종일 의학 전공 일을 하는 힘든 생활을 7년 동안 계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박사학위를 받고 군의관 복무를 마친 다음, 컴퓨터와 의학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시점이 왔다. 고민을 거듭하던 중 그 실마리는, 내가 그때까지 살아왔던 삶은 남이 보기 좋은 삶이라는 데서 풀렸다.

서울의대 졸업, 20대 의학박사, 20대 의대교수로 이어지던 순탄한 과정은 남이 보기에는 좋았을지 모르지만, 컴퓨터를 하면서 느낄 수 있었던 자부심, 보람, 사명감, 성취감 등은 느낄 수 없었다.

아직도 살아온 시간보다는 살아갈 날이 많은 시점에서, 지금까지 쌓아온 것에 연연하기보다는 지금 현재 보람을 느낄 수 있고 앞으로 해나갈 것이 많은 쪽을 선택하는 것이 올바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14년간 공부해서 박사학위까지 받았던 의학을 깨끗이 포기하기로 했다.

95년에 안철수연구소를 설립하고 경영하는 동안 어려운 결단을 해야 하는 순간은 끊임없이 찾아왔다. 외국의 유력 보안회사에서 최소 천만 달러에 인수 제의를 해왔을 때 이를 거절한 일, 닷컴 기업에 투자하면 누구나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 핵심역량과 관계되는 분야가 아니면 투자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켰던 일, 벤처 열풍이 불었을 때 코스닥에 등록하지 않고 기다렸던 일 등이 그러하다.

선택의 기로에서 최종 판단의 근거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옳은 결정인가, 누구에게 이익인가 하는 문제이다.

코스닥 등록시기 결정의 경우 거품이 빠질 것을 예측하고 있었고, 비정상 상황에서 등록하면 회사는 공모자금을 많이 확보하고 주주들은 많은 돈을 벌 수 있지만 신규 투자자들과 직원들은 손해를 볼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훨씬 적은 공모자금을 받으면서도 2001년 9월에야 등록을 한 것이다.

처음 벤처기업인 안철수연구소를 설립했을 때 세운 목표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일반 사용자들에게는 공익적인 목적으로 백신 프로그램을 계속 무료로 보급하는 것이고, 둘째는 기업체나 관공서 같은 곳에 판매를 해서 벤처기업답게 커간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많은 분들이 걱정을 해주었다. 벤처기업이란 말 그대로 처음부터 위험 가능성을 안고 시작하는 기업인데, 공익이라는 또 하나의 위험 가능성을 보탠다면 십중팔구는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지금까지는 이러한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잘 꾸려왔다고 생각한다. 연구소 설립 이후에 공익적인 활동도 더 강화되어 전 국가적으로 컴퓨터 바이러스의 피해를 막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기업 경영적인 측면에서도 건실하게 운영되어 IMF 시대에도 빚을 지지 않고 계속 성장세를 지속하여 벤처기업답게 커가고 있는 중이다. 비록 지금은 의사의 길에서 떠나왔지만, 의대 시절 봉사활동을 할 때의 마음을 계속 간직하려고 노력한 결과일 것이다.

첫 유학에서 의학과 완전히 결별하다

1995년 3월 회사를 설립했을 당시 경영자로서의 고민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회사 규모가 구멍가게 수준이기도 했거니와, 우리 회사는 연구 개발만 하고 마케팅 및 판매는 한글과컴퓨터가 전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사의 책임자로서 앞날을 생각하면 늘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당장 수익을 창출할 시장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매출액이 연 1백억 원을 넘던 소프트웨어 회사들을 보면서, 우리는 언제 저렇게 되어보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시장이 없었던 것은, 당시 V3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시장이 열릴 때까지 기술을 개발하면서 버텨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나는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새로운 것을 공부하기 위해 나간다는 것은 무척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일단 선택한 것에는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당시 나는 의학과 컴퓨터 양쪽 모두 전공을 살릴 수 있는 메디컬 인포매틱스(medical informatics), 즉 의료정보학을 공부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당분간은 회사 경영에 필요한 지식도 얻기를 바랐다. 그런 계획을 가지고 입학한 곳은 펜실베이니아대학의 EMTM 과정(Executive Master of Technology Management, 일종의 테크노 MBA 과정)이었다.

뉴욕 케네디 공항에 내린 후 다시 비행기로 한 시간을 날아가서 펜실베이니아에 도착했다. 첫 수업인 마케팅 강의에 들어가 보니 외국인은 나밖에 없었다.

의학을 공부하면서 영어로 된 원서를 많이 읽었지만 듣기 훈련이 안 된지라 강의에 익숙해지는 데 많은 시간이 들었다. 더구나 마케팅은 처음으로 접하는 분야여서 초보적인 개념도 정립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다고 해서 초면의 미국인들에게 모르는 걸 물어보기도 망설여져 참으로 곤혹스러웠다.

2년이 지난 후 나는 기술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의료정보학으로부터 멀어진 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경영 쪽으로 자의 반 타의 반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일반 MBA가 금융업·제조업 등의 전 산업 분야에 걸쳐 필요한 경영을 배우는 데 비해서, 테크노 MBA 과정은 말 그대로 첨단 기술의 경영에 관계된 부분을 배우는 과정이다. 따라서 경영과 기술적인 지식 모두가 필요한 벤처기업의 경영을 맡은 나 같은 사람에게는 맞는 과정이었다.

지금에야 말하지만 의대를 졸업하고 대학원·박사과정을 거치면서 임상의가 아닌 연구실을 택한 나에게는 나름대로의 꿈이 있었다. 전공인 생리학 분야에서 열심히 노력해서 언젠가는 노벨의학상을 받겠다는 꿈이었다.

회사를 만들면서 그 꿈은 완전히 접었지만, 의료정보학을 꿈꾸면서 의학 분야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미국 도착 후의 상황은 나를 점점 더 회사 경영 쪽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우선 아무리 작은 회사라지만 주식회사 형태의 연구소가 차려진 마당이니 사장으로서 경영을 알아야만 했다. 아무런 소질도 경험도 없이 회사를 만든 탓에, 시행착오를 줄이려면 경영 공부를 한시라도 빨리하는 것이 회사를 위하는 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경영학에서 배운 것을 회사 운영에 적용하는 가운데 스스로도 조금씩 경영학의 가치에 눈을 뜨게 되었고, 그런 가운데 의학과는 완전히 결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국 펜실베이니아대학을 졸업할 무렵에 나는 10년 이상 공부해온 의학과 완전히 결별하였다.

회사 일로 한국에 잠시 돌아와 그 사실을 한 직원에게 말했을 때 이런 대화를 나눈 기억이 난다.

"이제 사장님도 참 피곤하게 됐네요. 사람들이 예전에 사장님을 좋아했던 이유는 의사임에도 컴퓨터 관련 일을 했기 때문이었잖아요. 또 회사를 세운 후에도 전문경영자가 아니고 의사이기 때문에 실수를 좀 하더라도 봐주는 면도 있었을 테고요. 그런데 이제부턴 그런 여지가 싹 없어지는 것 아닙니까?"

그것은 값진 충고였다. 그 얘기를 듣고 나니 '아, 이제 나를 보호해줄 안전판이 완전히 사라진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는 철저히 경영자로서 검증을 받아야 하고, 연구소를 성장하는 회사로 키우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영자에서 다시 학생으로

2005년 3월 창립 10주년 기념일을 기해 나는 회사 최고경영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이유는 CEO 한 사람의 영향력이 너무 크면 회사가 더 크게 성장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10년 된 인원 300여 명, 연간 매출액 400억 원 규모의 기업에서 세계적인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그만한 경영 역량을 가진 전문경영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퇴임 후 나는 곧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스탠퍼드대학에서 몇 개 과목을 수강하며 경영대학원 입학을 준비했다. 일 년의 준비 끝에 기업 경영 10년 이상의 경력이 있는 사람만 지원할 수 있는 펜실베이니아대학 와튼스쿨에 지원해 약 1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

첫 학기에 전체 학생 중 상위 10퍼센트에 들 정도로 열심히 공부에 매진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지난 10년 간 이것도 모른 채 경영을 해왔나' 하는 생각에 아찔해지곤 한다. 공부를 마친 후 어떤 일을 할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

다만 살아가는 동안 크고 작은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돈이나 명예는 빼놓고 나에게 남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는 원칙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이글은 각계에서 일가를 이룬 명사 23명의 내 인생의 특별한 순간, 결정적 계기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내 인생의 결정적 순간(이미지박스)'에 실린 글을 저작권자의 동의를 얻어 발췌하였습니다.


초청 칼럼니스트 프로필 및 저서소개
안철수연구소 이사회 의장, 1988년 의학박사 시절에 처음 컴퓨터 바이러스 치료 프로그램을 만든 이래로 7년간 새 바이러스가 나올 때마다 치료 엔진을 무료 보급한 것이 계기가 되어 국내 정보보호 산업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1995년 안철수연구소를 설립하여 10년간 경영하다 퇴임한 후, 지금은 이사회 의장으로서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와튼 스쿨에서 최고경영자 과정을 밟고 있다. 저서로는 <영혼이 있는 승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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