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의는 엄마가 준비해 둔 것을 입혀라,부의금은 절대 사절해라,화장한 재는 엄마가 아끼는 정원의 주목 밑에 뿌려라,묘비명은 '평생 감사하며 살다가 한 점 미련 없이 생을 마치다'로 해라,기일에 제사는 지내지 마라,너희 아빠의 재혼은 안 된다…."

소설가 한말숙씨가 미리 써놓은 유언장이다.

한씨는 문인 101명의 가상 유언장을 묶은 '오늘은 내 남은 생의 첫날'(경덕출판사)이라는 책에서 자식 사형제에게 이같이 당부했다.

이 책은 문예지 '한국문인'에 연재된 원로·중진 문인들의 유언을 묶은 것이다.


문인들은 작가로서의 삶을 반성하는 글부터 '무소유'라는 한마디로 자신의 일생을 응축한 글까지 다양한 인생 독후감을 남겼다.

이들은 대부분 배우자나 자녀에게 편지 형식의 유언장을 썼다.

소설가 유현종씨는 아들에게 남긴 가상 글에서 작가적 양심을 지키며 살아왔는가를 자문한다.

"폭압의 역사를 살아내면서 문행일치(文行一致)를 보이지 못하고 산 것은 수치스럽고 창피하다. 작품으로뿐만 아니라 몸으로 막아 싸웠어야 하는데 늘 주저하다가 뒤로 물러나 앉은 것이다."

유씨는 그러면서도 "나는 좋아하는 일로 일용할 양식을 구하며 살아왔으니 다시 태어나도 작가가 되련다"며 자신이 쓴 작품을 모두 찾아내 '한 벌'만 디스켓에 옮겨 무덤에 합장해 달라고 썼다.

시인 도종환씨는 아들에게 말했다.

"내가 쓴 책과 원고 등 문학과 관련된 자료들은 아버지와 함께 문학·문화단체에서 일을 함께 한 후배들에게 공적 자산으로 전해 주거라.내가 쓴 글 속에 담긴 정신을 네가 마음 속에 담아두면 그것으로 됐다."

수필가 정목일씨는 아들에게 남긴 글에서 "사랑을 잃지 말라.떠오르는 해처럼 새로운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고,지는 해처럼 엄숙하고 아름다운 하루를 장식하라"고 당부했다.

시인 유자효씨는 '아들아,네가 꼭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보람 넘치는 삶을 살아라'고 썼다.

소설가 공선옥씨가 큰 아이에게 남긴 가상 유언장은 엄숙하면서 '재미'있기까지 하다.

"동생들 앞에서 의연해라….집안 청소나 깨끗이 하고 몇 가지 나물 하고 밥 하고 국 하고,그리고 물 한 그릇 엄마를 위해 딱 한 번만 차려주고 너희나 배불리 먹어라."

소설가 전상국씨는 자신의 소설들에 유언을 남겼다.

"항상 나보다 앞서 있는 내 독자들을 내가 얼마나 두려워 했는가를 너희가 증언해 주기를 부탁한다."

구상 시인은 2004년 작고하기 전 쓴 가상 유언장에서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오늘'부분)라는 시를 인용하며 '오늘에서부터 영원을 살자'는 글을 남겼다.

지난해 작고한 시인 이형기씨는 자신의 가상 유언장에 '무소유' 한 마디 밖에 쓸 것이 없다고 미리 썼다.

이해인 수녀는 자신의 관 위에 꽃 대신 시집 한 권을 올려 놓는 것을 꿈꾼다.

"책은 다 도서실로 보내면 되고 일기장들을 태우기 아까우면 보관했다 부분적으로 출판해도 될 것 같군요."

이 같은 문인들의 유언은 솔직담백하면서 깊은 성찰의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 하루가 삶의 마지막 날이자 남은 생의 첫날이라면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까를 오래 생각하게 해준다.

고두현 기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