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눈망울 가득 선한 기운과 장난기를 담고 있는 배우 엄정화가 안면몰수하고 복수의 화신이 됐다. 그것도 아주 잔인한 연쇄 살인범이 됐다. 산적꽂이로 얼굴을 마구 찍어대고 날카로운 가위로 남자 성기를 가격하며 석고팩으로 코를 틀어막으며 다섯 차례의 살인을 이어간다. '친절한 금자씨' 이영애가 자기 손에는 피를 묻히지 않고 복수를 했던 것에 비해 '오로라 공주' 엄정화는 세상에 미련이 없다는 듯 거침없이 돌진한다. 그래서 더 '액티브'하다. 여전히 그는 '착한' 외모지만 그런 겉모습을 배반하는 악랄한 복수를 펼치기에 색다른 흥미를 안겨준다. 27일 개봉하는 스릴러 '오로라 공주'(감독 방은진, 제작 이스트필름)로 당당히 원톱 여주인공의 대열에 올라선 엄정화를 만났다. ◇영화사에 먼저 러브콜 '오로라 공주'는 엄정화에게 첫 단독 주연작이라는 점, 잔혹한 연쇄살인범 역이라는 점에서 전작들과 비교할 수 없는 몇 배의 기쁨과 부담으로 다가왔다. 데뷔 후 처음으로 혼자서 극을 끌고 간 엄정화의 연기는 배우의 발전을 지켜보는 흐뭇함을 안겨준다. 특히 그간 엄정화에게 어두운 역할을 맡길 생각을 하지 못했던 많은 영화 관계자들에게도 엄정화의 변신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갔을 터. '오로라 공주'의 제작진마저도 처음에 엄정화의 캐스팅을 놓고 "누가 한다고?"라고 반문했을 정도니 말이다. "감독이 방은진 선배이고 장르가 스릴러라는 얘기만을 듣고 출연하고 싶어졌어요. 왠지 색다른, 그리고 센 영화가 나올 것 같았지요. 결국 지금껏 한번도 그런 적 없었는데 영화사에 출연하고 싶다는 의사를 적극적으로 먼저 밝혔습니다. 캐스팅이 끝났다면 단역으로라도 출연하고 싶었을 정도였거든요." ◇촬영 중 불면증과 악몽에 시달려 스스로 변화를 쟁취한 엄정화는 이후 5개월여의 촬영기간에 불면증과 악몽에 시달렸다. "그간 안 해봤던 연기라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여러가지 감정이 있는데 그중 잔인한 부분을 표현할 때는 어떨까, 뭔가에 대한 울분의 끝은 어떨까 궁금했지요. 그러다보니 생각이 많아졌고, 꿈을 꾸면 무조건 누굴 죽이거나 목을 조르는 내용이 펼쳐졌어요." 특히 아이를 잃은 주인공의 마음을 생각하니 실제로 촬영하면서 감정이 점점 증폭됐다고 한다. 이는 스크린 속에 고스란히 담겨졌다. "아직 직접 경험을 하지는 못했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아이를 낳으면 자기 인생이 없어지더라구요. 그만큼 아이가 소중한데 그런 아이를 잃었으니 주인공은 끊임없이 자학을 했을 것 같아요. 기분이 너무 다운돼 있다보니 촬영 없을 때도 우울해 친구들이 제 눈치를 봤지요." ◇단독으로 찍은 포스터 보고 눈물 나 첫 단독 주연의 감격은 영화 포스터와 영화 크레디트를 통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길거리에 저 혼자 찍은 포스터가 붙어 있는 것을 봤을 때 기분이 진짜 이상했어요. 또 시사회에서 배우 이름이 올라갈 때도 눈물이 났지요. (최)화정이 언니가 시사회에서 내 이름이 처음으로 올라가자 아무말 없이 제 손을 꼭 잡아주더군요." 2001년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시작으로 영화에 적극 뛰어든 엄정화는 그동안 '싱글즈',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을 통해 착실하게 필모그라피를 다져나갔다. 특히 '내 생애…'에서는 화면에서 자유자재로 노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의 성실한 자세와 탄탄한 연기력은 빠른 시간 내에 가수에서 연기자로 이미지 전환을 시켰고 '오로라 공주'까지 만나게 됐다. 시나리오가 부지런히 들어오는 것은 물론, 11월에는 곧바로 차기작 촬영에 돌입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겸손하다. "어떤 배역을 맡겨도 믿을 수 있는 배우라는 인상을 심어주려고 해요. 또 저를 생각하며 썼다는 시나리오를 만나고 싶습니다. 좋은 작품을 만나는 배우들이 너무 부러워요. 다음에는 진짜 악역도 꼭 해볼 거예요." 연기 욕심으로 똘똘 뭉친 이 착한 배우의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된다. (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pretty@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