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대하게 쏟아지는 유물. 그에 비례해 점점 멀어져만 가는 재건축 아파트의 꿈. 그 종국은 한국고고학 사상 최악의 사태였다. 2001년 5월 13일 오전 9시. 내 집 마련을 꿈꾸던 재건축아파트 일부 조합원은 굴착기 1대를 동원해 발굴현장으로 들어갔다. 이 때 현장은 텅 비어 있었다. 발굴조사비 문제로 조합 측과 옥신각신하던 조사원들도 철수하고 없었다. 이곳에 들어간 굴착기는 한창 조사 중인 유적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이 사태는 결국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마침 현장을 찾았던 한 조사단원이 경찰에 신고함으로써 30분 만에 유적 무단파괴 행위는 수습되었다. 이 충격적 사태에 경악한 정부는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의 결단으로 그해 5월 26일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통해 재건축아파트 예정지 2천여 평 전체가 사적 지정이 예고되기에 이르렀다. 이곳이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서울 송파구 풍납1동 136번지 일대 소위 '경당연립재건축아파트지구'. 한성 도읍기 백제의 가장 중요한 성곽 유적으로 거론되는 풍납토성 전 구역 중에서도 한복판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 때 사건으로 경당지구에서 확인된 각종 유적 중에서도 44호 주거지라는 이름이 부여된 대형 건물터(16 x 14m 이상)와 함께 가장 중요한 유적으로 거론된 곳이 이 주거지 인접지점에서 확인된 제9호 구덩이는 거의 완파됐다. 구덩이는 장축 13.5m, 단축 5.2m, 최대 깊이 2.4m에 이르는 길쭉한 타원형으로 "지금까지 풍납토성 내부에서 조사된 단일 유구로는 44호와 함께 최대급에 속한다. "(한신대박물관 '풍납토성Ⅳ' 발굴보고서 17쪽) 덩치에 어울리게 출토유물은 토기류 2천 점과 기와 120여 점을 포함해 수천 점을 헤아린다. 이 중에서도 발굴 당시에 가장 큰 관심을 끈 것이 아래턱뼈만 남은 10마리 개체분 말뼈와 '大夫'(대부), '井'(정)이라는 글자(혹은 부호)를 새긴 토기였다. 문화재보호법에 의하면 발굴조사 완료와 함께 해당 조사기관은 "특별한 사정이 허락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2년 내에 보고서를 내야 한다. 경당지구는 2001년 5월에 발굴이 (비록 불완전했으나) 끝났으므로 2003년 5월까지 보고서를 내야 했다. 하지만 각종 사고 사건으로 점철된 경당지구 조사를 맡은 한신대박물관은 더 '황당한' 일을 경험하게 된다. 발굴조사비를 제 때에 제대로 받지 못한 것이다. 시공사인 건설업체는 조사 중에 부도가 났다. 사적 지정으로 아파트 건축이 무산돼 격앙될 대로 된 사업주체 재건축조합이 나머지 조사비와 발굴보고서 비용을 부담할 리 만무했다. 이에 한신대박물관은 문화재청에 발굴조사비 국고 보조를 요청했으나, 선례가 없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책임조사연구원은 한신대 권오영 교수. 한창 조사가 진행되고, 막대한 유적과 유물이 쏟아질 때만 해도 권 교수는 "(경당지구 발굴로) 박사 논문 10편은 나올 것" 혹은 "나로서도 10년 동안 연구 주제 걱정할 필요없다"는 등의 자신감과 긍지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그도 무단 파괴 사건 와중에 경찰로 불려 다니느라, 현장에서는 조합원은 물론이고 취재진과도 때로는 충돌하면서 갖은 일을 겪어야 했다. 그러다가 ㈜이지바이오시스템 지원철 대표, 플랜티넷의 김태주 대표 등의 개인 후원과 박물관 자원봉사자 5명 등의 힘을 빌려 마침내 조사완료 4년 만에 경당지구 발굴보고서 중 첫 성과인 '풍납토성Ⅳ : 경당지구 9호 유구에 대한 발굴보고'를 완성했다. '풍납토성 Ⅳ'라고 한 까닭은 앞서 나온 풍납토성 다른 지역 발굴보고서 세 종류에 각각 Ⅰ~Ⅲ이라는 일련 번호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발굴조사에서부터 사적지정, 주민보상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본 박물관과 발굴단은 행정관서, 언론, 지역주민, 여론으로부터 많은 오해와 비난을 받았지만 훌륭한 보고서를 학계에 제출하는 것만이 최선의 해결책임을 믿고 묵묵히 4년 간 작업을 진행하여 왔다"(보고서 9쪽)는 권 교수의 말이 단순한 수사라고만 보이지는 않는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taeshi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