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끔한 정통 멜로 영화가 탄생했다.


오는 11월 5일 개봉하는 톱스타 정우성, 손예진 주연의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편지' '접속' '약속' 등 1990년대 후반 스크린을 평정했던 멜로 영화의 바통을성공적으로 이어받았다.


이 영화는 드라마, 스타일, 주연배우들의 연기가 고루 90점을 넘어선다. 최루성이지만 억지스럽지 않고, 통속적이지만 그 나름의 신선함이 배어난다.


여기에 스타성은 A+. 상업 멜로 영화로서 이보다 행복할 수 있을까.


마지막 손맛이 다소 부족하다고 해도 대세에는 지장이 없다.


"넌 너무 자신만만해. 인생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냐?"


극중 철수(정우성 분)와 수진(손예진 분)이 결국 번갈아 가며 내뱉는 이 대사는영화의 통속성을 상징한다. 예상대로 사랑은 핑크빛이 아니고 두 배우는 잇따라 눈물 흘리기 경쟁을 펼친다.


철수와 수진은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결혼에 골인하지만 수진이 스물일곱 나이에 알츠하이머라는 어이 없는 병에 걸리면서 불행이 시작되는 것. 그러나 영화는 그러한 '뻔함'을 불식시킬 만큼 색이 잘 들었다.


어느새 단풍이확 타오르듯 곱게 색이 들어, 익숙한 멜로임에도 전개될수록 관객의 몰입을 이끈다.


참 희한하게도 눈길을 사로잡아야 할 조연들이 오히려 감상을 방해하는 것이 걸리지만, 주연배우들의 포지셔닝이 워낙 잘 돼 있어서인지 큰 지장은 없다.


"내가 대신 다 기억해줄게, 내가 네 기억이고, 영혼이야"


철수가 자신을 떠나려는 수진을 달래며 하는 말. 이 말이 '닭살스럽지' 않을 수있었던 것은 앞서 전개된, 둘이 사랑을 나누는 과정이 그만큼 설득력 있기 때문이다.


유부남 상사와 도망치려다 버림받은 수진이 건설판 일꾼 같은 철수와 사랑에 빠지는 세세한 에피소드와 광고 같은 화면(실제로 정우성이 양복 수트를 차려입고 나올 때마다 모 CF를 연상시킨다)이 차곡차곡 쌓여 관객으로 하여금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하게 만든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멜로영화에서 두 남녀 주인공의 스타일과 연기의 합이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일깨워준다.


정우성과 손예진은 같이 있는 모습이 하나의 CF였으며, 단순한 이미지를 넘어서 진짜 서로 사랑에 빠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동시에 관계마저 그들을 사랑하게 만든다. 감정이입이 승부처인 멜로영화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궁합이 없는 것. '약속'에서 전도연과 박신양이 보여준 찰떡 호흡처럼말이다.


그러니 철수를 앞에 놓고도, 옛 애인 '영민'의 이름을 부르는 수진의 모습에 철수도, 관객도, 수진도 모두 안타까울 수밖에.


"내 머리 속에 지우개가 당신마저 지울까봐 너무 무서워!"


영화는 죽음보다 더 가혹한 망각을 건드렸다는 점에서 참신하다.


일본 요미우리TV에서 방송한 12부작 드라마 '퓨어 소울'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젊디젊은 나이에 치매에 걸린 여성이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잔인한 현실을 이야기한다.


그런 점에서 여주인공이 백혈병에 걸린 할리우드 클래식 '러브 스토리'의전형성을 빗겨간다.


그럼에도 감독은 '최루성'이라는 표현을 거부한다. 단편 '컷 런스 딥'으로 주목을 받은 이재한 감독은 "말초적으로 눈물샘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 울음이 메아리지는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관객의 슬픔을 증폭시킬 정우성의 통곡 장면 등 몇 컷이 편집에서 잘려나갔다.


감정의 절제를 위한 감독의 선택.


이 영화의 최대 아쉬움은 CF 같은 화면에도 기억에 남는 음악이 없다는 것. 귀를 사로잡을만한 음악이 있었다면 몰입의 효과를 극대화했을 텐데 그 부분에서 취약했다.


신인 감독의 서툰 손길이 느껴지긴 하지만 이 정도라면 웰메이드 상업 멜로 영화로서 손색이 없다.


(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pretty@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