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상대방에게 말했다.


"당신은 훌륭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입에 발린 말이라도 듣기 좋은 소리인데 당사자가 냉큼 부정했다.


"나는 한심한 놈입니다." 지나친 겸손이라고 여겨서일까.


다시 칭찬의 말을 건넸다.


"당신은 항상 열심히 일하고 가족을 부양해 왔습니다." 이쯤 하면 '고맙습니다'로 끝맺으면 될 터인데 되돌아온 답변이 가관이다.


"다른 도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나는 사실은 게으르고 쓸모없는 인간입니다.나는 나 자신을 증오합니다."


짐작할 수 있겠지만 먼저 말을 꺼낸 이는 정신과 의사이고 답변한 이는 우울증 환자다.


어느 여성은 얼굴에 털이 날까봐 노심초사였다.


어렸을 적 여성스럽지 못하거나 흉악한 여성들에게는 얼굴에 털이 나는 법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설혹 여성스럽지 않더라도 얼굴에 털이 무성하게 날 리는 없다.


그런데도 어린시절의 이야기가 이 여성을 공포에 빠지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더욱이 주변에서는 이 여성이 지극히 여성적이라고 반응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답은 간단하다.


호수처럼 잔잔한 정신의 수면을 박차고 오른 자기증오라는 '토네이도'가 일으킨 '재해'인 것이다.


디오도어 루빈의 '절망이 아닌 선택'(안정효 옮김,나무생각)은 자기증오라는 회오리바람이 얼마나 집요하고 교묘하며 광포한지를 말하고 있다.


어느 은퇴한 부자는 지독한 권태를 느껴 정신병원을 찾았다.


상담 과정을 통해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업과 돈벌이였음을 확인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그가 아득한 청년시절 어류학에 관심을 두었다는 사실이 '발견'됐다.


젊은날의 갈망을 '감금'시킨 덕에 사회적 성공을 이루었을지 모르지만 그의 정신세계는 끝내 황량해졌고 급기야 권태라는 덫에 걸렸던 것이다.


이 사례를 읽으며 혀를 차게 되는 것은 이 환자가 넘기 힘들어했던 가장 높은 벽이 돈과 관련 없는 활동에 뛰어드는 일에 대한 갈등이었다는 점이다.


자기증오라는 치명적인 질병에 걸린 사람을 구제할 유일한 해독제는 관용뿐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관용은 '삶을 긍정하는 모든 힘들 가운데 가장 강력하며''우리들 자신에 대한 은총의 경지가 이룩된 상태'라는 것이다.


이성이라는 탐조등으로는 결코 그 심연이 비춰지지 않는 우리의 내면세계는 끊임없이 균형상태를 유지하려 한다.


그러기에 자기증오에 따른 우울증은 일종의 경고다.


경쟁의식과 완벽주의만을 추구하다 보니 자신에게 불가능한 기준을 들이밀게 된다.


모든 기쁨은 미래로 유예되고 자기증오만 남게 된다.


지은이는 그 증오의 지하 감옥에 창문을 하나 내주자고 말하는 셈이다.


실패와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창,더 훌륭해지려는 욕심을 버리는 창,꼭 완전할 필요는 없다는 창.자신에 대한 관용의 힘은 얼마나 세던지 자기증오라는 먹구름을 몰아내고 일상의 평온을 되찾게 해준다.


이권우 도서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