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문학계는 기존 판도를 뒤엎을만한 새로운경향이나 논쟁거리가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몇가지 점에서 두드러진 특징을 드러냈다. 우선 1990년대 소설과 구별되는 새로운 소설의 등장을 꼽을 수 있다. 신진 여성작가 정이현이 발표한 첫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는 1990년대작가들의 개인주의적 글쓰기를 뛰어넘는 새로운 글쓰기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민족과 민주화 등 집단에 관한 이야기가 주도했던 1980년대 한국문학이 1990년에 이르러 개인의 문제로 돌아섰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최근까지도 개인적 고백이나 자잘한 일상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소설이 유행했다. 연세대 정과리(문학평론가) 교수는 "이전의 여성작가들이 여성의 고유한 세계에머물러 있었다면 정이현의 소설은 여성이 사회속에서 어떻게 싸우고 진화하는지 보여준다"면서 "그의 소설은 새로운 글쓰기를 통해 여성들의 개인적 문제를 사회적 문제로 연결시키는데 성공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국가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이 강해진 것도 요즘 문학에 나타나고 있는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20세기 초 멕시코 이민 1세대의 이야기를 다룬 김영하의 장편 「검은 꽃」은 국가 이데올로기보다 '인간존재 일반의 운명'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보통의 역사소설과다르다. 에네켄 농장 생활의 수난사에 못지않게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된 이민자들을 실어날랐던 일포드호 선상에서의 삽화, 인종간의 다양한 갈등을 그리는데 치중했다는것은 작가가 국가적 이데올로기보다 인간의 보편적 삶에 더많은 관심을 쏟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건에 대한 묘사와 기록을 특징으로 하는 소설형식을 깬 '에세이같은 소설'의등장도 올해 한국문학에 나타난 주요 현상 가운데 하나다. 정과리 교수는 "창작집 「노래의 날개」와 연작 장편소설 「내 시대의 초상」을동시 출간한 이윤기, 두번째 소설집 「엘리아의 제야」를 발표한 고종석 등의 작품은 마치 '비평을 하듯' 사건을 끊임없이 되새기고 의미를 부여하려는 경향을 보인다"고 평했다. 올해 주목할만한 신인 소설가로는 문학동네 신인상과 한겨레문학상을 잇따라 수상하며 문단에 등장한 박민규를 들 수 있다. 그는 '우리에게 미국은 무엇인가'라는 묵직한 주제를 만화적 상상력으로 풀어헤치는가 하면, 한국 프로야구의 만년 꼴찌팀이었던 '삼미 슈퍼스타즈'를 소재로 경쟁과 죽음을 부추기는 현대 자본주의의 실상을 신랄히 풍자한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를 발표하는 등 눈길을 끌었다. 개인의 사소하고 구체적인 기억을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기억으로 승화시키는 기량을 가진 삼십대 초반의 김연수는 소설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로 올해 동인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90년대를 주도했던 여성작가들의 활동이 다소 둔화된 가운데 신경숙은 단편집「종소리」를 통해 모성성의 회복과 구원의 문제를 드러내 보였다. 지난해 '뱀장어스튜'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권지예는 일상에 깃든 삶의 부조리를 탐구한 두번째소설집 「폭소」를 내놓았다. 중진작가들의 꾸준하고도 활발한 작품발표는 영상문화의 번창과 함께 대두된 '문학의 위기론'이 지나친 기우가 아닐까 하는 반성을 하게 했다. 이청준은 장편 「신화를 삼킨 섬」, 송기숙은 단편집 「들국화 송이송이」, 박상륭은 장편 「신을 죽인자의 향로는 쓸쓸했도다」, 윤흥길은 단편집 「낙원? 천사?」, 유익서는 단편집 「바위물고기」, 황석영은 장편 「심청」, 이경자는 장편 「그매듭은 누가 풀까」, 최윤은 장편 「마네킹」, 백시종은 단편집 「서랍속의 반란」,정찬은 소설집 「베니스에서 죽다」, 홍희담은 단편집 「깃발」, 최인석은 장편 「이상한 나라에서 온 스파이」 등을 발표했다. 젊은 작가들 가운데 성석제는 「인간의 힘」, 임영태는 「무서운 밤」, 김형수는 「이발소에 두고온 시」, 이현수는 「토란」, 박현욱은 「새는」, 김경욱은 「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 등 개성적인 작품들을 내놓았다. 시부문은 정현종이 4년만에 신작시집 「견딜 수 없네」, 이성복은 10년만에 「아, 입이 없는 것들」, 김광규는 「처음 만나던 때」를 내놓는 등 중진들의 건재를확인한 한해였다. 하종오는 「무언가 찾아올 적엔」, 이영유는 「검객의 칼끝」, 양성우는 「물고기 한마리」, 최승호는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 정일근은 「마당으로출근하는 시인」을 출간했다. 한편, 계간 시전문지 「시평」은 1980년대 중반 이후 점차 사라진 '신인 추천제'를 부활시켰는가 하면, 김지하와 김준태 등이 이 잡지를 통해 등단했으나 당국의 압력으로 1년반만에 폐간됐던 시전문지 「시인」이 반연간지로 올해 복간됐다. '선창' '꿈꾸는 백마강' '알뜰한 당신' '낙화유수' '고향초' 등 수많은 가요명곡을 작사한 시인 조명암(본명 조영출. 1913-93)의 시전집과 분단공간에서 매몰된시인 이찬(1910-1974)의 시전집이 출간되는 등 월북문인들의 문학세계를 재조명하는작업도 올해 이뤄졌다. 민족문학작가회의 등 문인단체들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한국군 파병에 반대하는 성명서 발표와 가두행진 등을 펼쳐 반전여론을 확산시켰다. 시인 박노해와 소설가 오수연 등은 전쟁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현장소식을 글로 전하기도 했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 전12권이 프랑스어로 번역돼 출간됐으며, 이 소설의 무대인 전북 김제에 '아리랑 문학관'이 올해 세워졌다. 지난 2월 새 정부 출범때 소설가이자 영화감독 이창동이 문화관광부 장관에 발탁됐고, 문화예술진흥원장에 소설가 현기영,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에 평론가 염무웅이 올해 취임했다. 토속적인 문체의 농촌소설 「관촌수필」을 남긴 이문구, 한국시단의 마지막 로맨티스트로 불렸던 조병화, 시조부흥운동을 펼쳤던 시조시인 이태극, 아동문학가이자 우리말연구가인 이오덕 등 문단의 원로들이 올해 유명을 달리했다. (서울=연합뉴스) 정천기 기자 ckchun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