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리한 풍자와 재치있는 입담으로 주목받는 작가 성석제가 네번째 장편소설 '인간의 힘'(문학과지성사)을 냈다.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 임진왜란의 혼란 속에 시골양반 가문에 태어나 병자호란을 전후하기까지 네번이나 가출을 감행했던 한 선비(채동구)의 이야기를 통해 시공을 초월해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탐색한다. 액자소설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책은 외가 문중 조상의 신도비 고유제에 참석한 '나'의 관찰로 시작된다. 제사 중간에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난 한 청년을 보고 채동구라는 인물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된다. 채동구는 선조 29년(1596년) 조선 전기의 문신 채담의 3대손으로 태어난다. 후처의 아들로 분가해야 했던 채동구는 가난한 살림 때문에 과거를 보지 못한 채 전형적인 시골양반의 삶을 살아간다. 뚜렷이 하는 일은 없어도 언제나 나라 걱정을 하던 채동구에게 어느날 인조 반정과 이괄의 난이라는 대사건이 일어난다. 도성을 내주고 임금이 쫓기고 있다는 소식에 채동구는 혈혈단신 첫번째 가출을 감행한다. 그러나 고생 끝에 초라한 행색으로 어가(御駕) 주위만 맴돌다 돌아오고 만다. 몇년 뒤 정묘호란이 발발해 다시 집을 나서지만 임금이 있는 곳에 당도하자마자 화의가 성립돼 허망하게 돌아온다. 이 작품의 주인공 채동구는 실존 인물로 작가의 외가 쪽 십몇대 조상이다. 1990년대 초 작가의 외삼촌인 채광식씨가 번역하고 묶은 '오봉선생 실기'를 본 뒤 네번이나 가출한 채동구에게 흥미를 느끼고 소설로 써보고자 마음먹었다고 한다. 작품 속의 '나'는 신도비에 새겨진 그에게 질문한다. "선생,왜 그렇게 집을 나섰던 거요? 집을 나서 보니 얻을 게 있습디까?" 제사를 준비했던 외숙이 이에 답한다. "난 이 어른이 뭘 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했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네.이 어른은 초지일관해서 당신 길을 가셨네.남들이 우습다고 하고 미쳤다고도 했지만 어른은 신념을 지키셨네.신념이 옳다 그르다가 문제가 아니라 끝까지 변함없이 그걸 지킨 것,난 바로 그게 사람에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네." 김재창 기자 char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