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작가 유치진(1905-1974)이 현대희곡사 최고의 대중적 인지도와 영향력을 얻게된 것은 유신 등 권력이 그의 작품을 교과서에 싣는 등의 방식으로 국민교화를 위한 이데올로기 자료로 활용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문학과비평 연구회'(회장 강진구) 주최로 지난 21일 중앙대 서라벌홀에서 개최된 심포지엄 에서 김성현(중앙대 국문 박사과정)씨는 '해방 후 유치진의 연극이론 전개 과정과 남한 극계의 형성'이라는 논문을 발표, 유치진으로 대표되는 우익연극계와 정치권력의 밀월.공모의 이면사를 정면으로 문제삼았다. 유치진의 친일행적이 논란이 된 적은 있었으나 현재도 연극계에 작지않은 영향력을 드리우고 있는 그가 희곡계의 대가(大家)로 태어난 매우 민감한 과정을 공개,비판한 논문이 발표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상당한 논란이 예상된다. 김씨는 논문에서 1973년에의 제3차 교육과정 개편으로 최초로 고교교과서에 희곡이 실린 것에 주목, " '청춘은 조국과 더불어'와 '조국' 등 한 극작가의 작품이 두편이나 교과서에 실린 배경에는 이 시기를 전후해 연극계 원로이자 핵심권력으로서 유치진의 위치가 공고해졌다는 개인사적 맥락과 유신체제가 강화되면서 교과서를국민을 대상으로 한 '이데올로기 교화자료'로 활용해야 하는 정치석 필요성이 교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유치진은 해방후 '자명고' '원술랑' 등의 역사극과 반공을 주제로 한 '나도 인간이 되련다' 등을 발표했다. 국립극장장과 반공통일연맹 이사 등을 지냈다. 1971년한국극작가협회장에 취임, 희곡전집을 내놓았다. 김씨는 유치진의 '연극권력' 획득과정에 대해 "유치진 외에 딱히 다른 극작가를기억해낼 수 없는 것은..해방기의 상황에서 좌익연극과 흥행극을 소거해낸, 즉 대중의 기억자체가 봉쇄당한 결과로 이뤄진 공백의 산물"이라며 "이 공백을 메우는 과정이 유치진의 권력획득 과정이며, 문제는 이 권력화 과정이 해방후 남한 연극제도의 형성과정과 궤를 같이 하며 국가와 연극계간의 밀월관계를 공고히 한다는 데 있다"고 말했다. 유치진 등 우익연극인들이 까다로운 검열을 담은 공연법제정을 요구한 것과 관련, 김씨는 공연법의 목적이 '역족운동의 사상'(좌익극) '악질모리의 흥행'(대중극)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는 유치진의 1949년 신문논설을 상기시키면서 "공연법이 제정되지는 못했지만 상업극과 좌익극을 한틀로 묶어 신문화건설로 걸림돌로 치부하는과정에서 자연스레 우익연극의 세력화를 가능하게 했다"고 지적했다. 김씨는 1950년 국립극장의 설립.개관 역시 유치진이 이끄는 연극계 우익 헤게모니 획득의 가시적 성과로 파악했다. 김씨는 "해방기 연극계에서 유치진 역시 적지않은 창작물의 부피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시기에 준하는 문제작을 창작해내지 못한 것이 현실이었는데 창작의 부진 이면에는 연극행정가로서의 과도한 활동이 한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이날 토론회에서는 문예지 의 편집위원인 평론가 홍기돈씨가'김동리와 문단권력'을, 상지대 강사인 오창은씨가 '외국문학 전공자들의 상징적 권력획득에 관한 고찰'을, 중앙대 강사인 염철씨가 '비어있는 중심의 힘-이어령과 문학사상'을 각각 발표했다. 비평가인 권성우 숙명여대 교수와 고영직(동국대), 고명철(성균관대), 정호순(동신대), 이명원(비평과 전망 편집위원)씨 등이 토론에 참여했다. (서울=연합뉴스) 신지홍 기자 shi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