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중한 암석 정면에 타원형으로 구멍을 판 시커먼 공간이 눈길을 끈다. '신탁(神託)'이란 제목이 붙은 이 조각 작품은 거친 사암(砂岩)덩어리의 한가운데에 구멍을 파고 검은색 안료로 채색해 신비스런 느낌을 준다. 왠지 손을 안쪽 깊숙이 빨아들이려는 흡인력을 갖고 있다.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갖고 있는 애니시 카푸어(49)는 인도 출신으로 국제 미술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조각가다. 한국에서의 첫 개인전인 이번 전시에 '뒤집어진 세상''지금 막,공간은 오브제가 되다' 등 8점의 조각 설치작을 내놨다. 지난 20여년간의 작업을 되돌아보는 회고전 형식으로 꾸몄다. 카푸어는 1990년 베니스비엔날레 영국관에 출품한 작품이 'Premio 2000'상을 수상하면서 국제 미술계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그는 재료를 다루는 테크닉이 뛰어난 작가다. 스테인리스스틸 대리석 브론즈 알루미늄 유리섬유 등 다양한 재료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오브제와 공간과의 조화를 통해 독보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했다는 평을 얻고 있다. '신탁'의 신비스런 공간은 "마크 로스코와 이브 클라인 같은 위대한 작가의 영향을 받았다"는 작가의 말처럼 회화의 색면을 연상시킨다. 스테인리스 스틸로 제작한 '뒤집어진 세상'은 오목거울 같은 작품으로 관람객의 움직임에 따라 이미지가 요술을 부린다. 투명 아크릴로 만든 사각형의 입체작품인 '지금 막,공간은 오브제가 되다'는 내부에 공기방울을 담고 있는데 주변 환경과 민감하게 반응한다. 형태와 빛 사이의 상호작용을 고려한 것이다. 카푸어는 물질을 물질로 바라보는 기존의 오브제 작업을 넘어서 눈에 보이는 물질의 속성과 보이지 않는 비물질의 속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카푸어는 "내 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는 관심이 없다"며 "작업하면서 오브제가 놓여 있는 공간과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에만 집중한다"고 강조한다. 6월29일까지.입장료 3천원.(02)735-8449 이성구 미술전문기자 s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