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이요? 우린 그런 거 모릅니다." 서울 용산구 삼각지에서 22년째 '이발소 그림'을 판매해 온 Y아트샵의 이명숙 사장(52)은 "미술계가 극심한 불황을 겪고 있지만 우리는 수요가 넘쳐 일손이 달릴 정도"라고 말한다. Y아트샵은 삼각지 일대에서 가장 큰 표구화랑업체로 액자를 생산하는 공장을 따로 갖고 있다. 이 곳에서 판매하는 '이발소 그림'은 한달에 4천∼5천점에 달한다. 삼각지 일대는 전국에 '이발소 그림'을 판매하는 20여개 표구화랑업체가 몰려 있는 도매상 밀집지역.지방의 영세 화랑이나 아파트 지역을 돌면서 '이발소 그림'을 판매하는 상인들이 이 곳에서 저가 그림을 사가는 단골 손님들이다. '이발소 그림'은 무명 작가들이 그린 싸구려 그림을 통칭하는 속어.전에는 똑같은 그림을 수십 점씩 그린 무명작가 그림이 주류를 이뤘지만 요즘에는 천경자 이대원 김창열 등 유명 인기작가의 그림을 비슷하게 그린 모작(模作)들이 넘쳐난다. 삼각지 일대의 표구화랑업체들은 IMF사태 이전만 해도 액자 위주로 판매해 침체상태를 벗어나지 못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IMF 한파가 고가 미술품 판매에 치명타를 입히면서 상대적으로 저가 그림인 '이발소 그림'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Y아트샵의 이 사장은 "최근 3~4년간 매출이 20% 이상 늘고 있다"며 "특히 요즘 같은 이사철에는 공급할 그림이 모자랄 정도로 연중 가장 바쁜 시기"라고 설명한다. 이 사장은 한달 매출이 얼마냐는 질문에 입을 다물었지만 판매 그림 수를 얼추 계산해도 1억원이 쉽게 넘는다. 또 다른 표구화랑업체인 G사의 김모씨(54)는 "그림을 보는 일반인들의 안목이 전에 비해 많이 높아져 5만원 이하의 싸구려 그림은 판매가 극히 부진한 반면 10만~20만원짜리가 많이 팔린다"고 말한다. 이곳에도 호당 가격제가 엄연히 존재한다. 인기 작가의 경우 10호가 2백만원에서 3백만원에 팔리고 있다고 한다. 미술 월간지인 '미술시대'의 류석우 주간은 "물방울 작가인 김창열 그림을 모작하는 작가만 10명이 넘는다"며 "이발소 그림을 잘 그리는 작가의 경우 월수입이 2천만원이 넘는 경우도 있다"고 소개한다. 소득 면에서 보면 이발소 그림을 한달에 수십 점씩 그리는 무명 작가들이 미술계에 잘 알려진 웬만한 작가들보다 훨씬 나은 셈이다. 이곳 도매상들은 5만원 이하의 그림만 이발소 그림이라고 부른다. 수요가 많은 10만∼20만원대 그림은 엄연히 작가들이 그린 '작품'이라는 것이다. 몇년 전 '이발소 그림'전을 기획했던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은 "삼각지 일대에서 판매하는 그림들은 예술적 가치가 없는 무명 작가의 작품이거나 아니면 인기 작가의 그림을 베낀 것들이 대부분"이라고 지적한다. 경기 불황으로 이발소 그림들이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이런 그림들은 '보는 즐거움'을 주지도 못하고 소장할 가치도 없다고 이 관장은 말했다. 이성구 미술전문기자 s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