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무렵 신동엽은 자신의 시를 통해 격동의 세월을 거치며 민족의 전통적 삶의 양식이 붕괴되는 과정과 이에 따른 현실의 허구성을 폭로하는데 힘을 기울인다. 신동엽은 시극(詩劇)에 눈길을 주기도 한다. 그가 1965년에 집필한 시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은 최일수의 연출로 국립극장 무대에 오른다. 이렇게 시의 장르적 변용에도 관심을 보이며 열정을 분출하던 신동엽은 1967년 신구문화사가 간행한 '현대 문학 전집' 제18권으로 기획된 '52인 시집'에 그동안 발표한 시들과 신작시 '껍데기는 가라' 등 7편을 실음으로써 더욱 확고하게 자신의 영역을 구축한다. 껍데기는 가라/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껍데기는 가라.//껍데기는 가라/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껍데기는 가라.//그리하여,다시/껍데기는 가라./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아사달 아사녀가/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부끄럼 빛내며/맞절할지니//껍데기는 가라./한라(漢拏)에서 백두(白頭)까지/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시인은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고 외친다. 그렇다면 그 '알맹이'란 무엇일까. 백낙청은 이 알맹이에 대해 "4.19에서 진짜 알맹이에 해당하는 것은 민중들이 외세를 배격하고 민중의 해방을 위해서 심지어 무기까지 들고 일어섰던 동학년의 곰나루의 그 아우성, 이것이 4.19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살려야 할 알맹이"라고 말한다. 1960년대에 이미 그는 냉전 체제의 변경에 위치한 한반도가 처해있는 국제 정치학적인 역학 구도 속에서 중립을 통해 민족 자주의 삶을 구현하자고 말한다. '껍데기는 가라'에서 선보인 '알맹이', 동학혁명과 3.1운동과 4.19혁명을 통해 잉태된 그 '알맹이'는 조국의 향그러운 흙 가슴 속에 묻혀 있다 '금강'에서 찬란하게 부화한다. '금강'은 4천8백여행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장편 서사시인데 1967년 '펜클럽 작가 기금'을 지원받아 을유문화사에서 펴낸 '한국 현대 신작 전집' 5권 '3인 시집'에 실린다. 우리들의/어렸을 적/황토 벗은 고갯마을/할머니 등에 업혀/누님과 난, 곧잘/파랑새 노랠 배웠다./울타리마다 담쟁이넌출 익어가고/밥머리에 수수모감 보일 때면/어디서려 없이 새 보는 소리가 들린다.//우이여! 훠어이!//쇠방울 소리 뿌리면서/순사의 자전거가 아득한 길을 사라지고/그럴 때면 우리들은 흙토방 아래/가슴 두근 거리며/노래 배워주던 그 양품 장수 할머닐 기다렸다./…… '금강'은 배 다른 누나와 함께 파랑새 노래를 배우기 위해 양품 장수 할머니를 기다리던 시인의 애절한 회상에서 발원한다. 그 물줄기는 4.19혁명에서 1919년의 기미 독립운동으로, 다시 1894년의 동학혁명으로 거슬러 오르며 구비구비 장강으로 펼쳐진다. 총 26장으로 구성된 이 서사시는 사건을 차례대로 늘어놓지 않고 현재와 과거를 빈번히 오가거나 병치하는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시간의 차이를 두고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하나의 전체로 파악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엿보게 한다. '금강'에서 신동엽은 농민들의 분노와 저항으로 불타오른 1894년 동학혁명 얘기를 할 때 실존 인물인 전봉준 최제우 최해월 등과 함께 시인 자신의 분신으로 여겨지는 가상 인물 신하늬를 등장시켜 시적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 시인.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