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대통령이나 정치 지도자가 경제계 대표를 만나는 일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 때만 해도 이런 일은 없었다고 한다. 이 대통령이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의식에 젖어 있어서 기업인들과 국사를 논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때문에 지난 61년 3월24일 오후 7시 서울 반도호텔 8층의 장면 총리 집무실에서 열린 회의는 기념비적인 자리였다. 장 총리를 비롯한 상공·재무장관 등 핵심 각료들과 한국경제협의회 김연수 회장(당시 삼양사 회장),이한원 부회장(당시 대한제분 사장) 등 경제인들이 처음으로 자리를 함께한 '정·재계 회의'였기 때문이다. 김입삼 전국경제인연합회 상임고문(81)은 "재계가 당당히 국사(國事)에 참여하는 주체로서 부상된 역사적 사건이며 훗날 '한강의 기적'의 초석을 마련한 자리였다"고 평가한다. 김 고문이 쓴 '초근목피에서 선진국으로의 증언'(한국경제신문사,1만9천원)은 이처럼 전후 격동기의 한국 경제 및 기업 발전사에 직접 참여해온 경험을 담은 회고록이다. 김 고문은 전경련의 전신인 한국경제협의회 창립(1961년 1월)과 그로부터 7개월 뒤의 전경련 창립에서부터 지금까지 활동해온 전경련의 산 증인.그동안 전경련을 비롯한 40여개 경제기구를 만드는 데 관여했다. 또 기업의료보험의 기초를 닦고 정부규제 철폐와 기간산업 육성을 위한 수출자유무역지대를 구상한 것도 그다. 책에는 그의 이런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4·19 이후 부정축재자 처벌을 위한 소급입법안을 경제인들이 총동원돼 막았던 일,장면 정부의 경제발전 청사진과 외자유치 노력,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과 재계 지도자들의 경제자문 등 한국 경제발전의 주요 장면들을 생생히 되짚는다. 5·16 이후 '부정축재자 1호'로 몰려 위기에 처했던 삼성 이병철 사장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첫 대면을 김 고문은 '항우와 유비의 만남'에 비유했다. 서슬 퍼런 군사혁명 최고지도자 앞에서 이병철은 "기업인의 본분은 사업을 일으켜 일자리를 마련하고 세금을 내며 기업을 키워가는 것이니 기업인의 본분을 다할 수 있도록 기회를 달라"고 해 위기를 넘겼다고 김 고문은 회고했다. 종업원 지주제 구상으로 사회주의자로 몰렸던 일,한반도의 지정학적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 구상한 포항에서 군산에 이르는 임해공업벨트,한·일 합동 경제간담회 창설,숱한 사연과 곡절 끝에 성사된 기업의료보험의 도입 등 현대 한국경제 발전사의 뒷얘기들도 실려 있다. 지난 74년 한·불 한·영 경협위원회가 본격 가동되면서 유럽의 약소국인 벨기에 경제인이 들려준 생존 비결이 흥미롭다. 주변 강대국의 침공을 자주 받고 통치당한 벨기에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역사를 어떻게 가르치느냐고 하자 이 경제인은 "약소국이 사려 없이 감정을 표출하면 강대국의 오해나 침공의 빌미를 줄 뿐이오.우리나라에선 유치원에서부터 남과 이야기할 때 언성을 높이거나 얼굴을 붉히지 않는 감정자제 훈련을 하고 있소"라고 대답했다는 것.명분보다 실리를 중시하는 생존비법으로 이해할 만하다. 고도 성장에 따른 부작용에 대한 자성도 잊지 않았다. 40여년을 경제계에서 보낸 김 고문은 "한국이 IMF 구제금융을 받게 된 것은 압축성장으로 특징지워진 경제발전 과정에서 꼭 해결하고 지나갔어야 할 중요한 일들을 간과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외환문제 신용관리는 물론 물가 금리 임금 기업윤리 등 국민생활이나 기업 및 경제운영의 척도가 되는 기본 요소들이 여전히 '미결 상태'라는 설명이다. 김 고문은 "이 책이 지난 40여년의 경제흐름 속에서 우리가 저지른 잘못을 짚고 뉘우치는 성찰의 기록이 됐으면 좋겠다"며 "끊임없는 자기혁신 없이는 어떤 조직이나 권력도 살아남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