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고시에 합격한 32세의 신출내기 젊은 관료가 조직의 수장인 장관을 향해 '최근 정책현안에 대한 장관의 생각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으론 이러이러한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봅니다'라는 요지로 직격탄을 날린다. 환갑을 바라보는 장관은 젊은이의 도발적인 문제제기에 당황하거나 불쾌해하기는 커녕 친절한 설명과 함께 자신의 정견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편지로 화답한다. 지금으로부터 4백50여년 전 조선시대 명종13년(1558년) 때 실제 이같은 일이 있었다. 논쟁의 주인공은 당대 지성계의 거목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이었다. '퇴계와 고봉,편지를 쓰다'(김영두 옮김,소나무,2만5천원)는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 소위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과 서로에 대한 안부,일상생활에서 느낀 점 등을 두루 담은 책이다. 당시 퇴계는 성균관 대사성으로 나이 58세였다. 반면 고봉은 이제 막 과거에 급제한 처지로 32세에 불과했다. 고봉의 논쟁 제기로 촉발된 두 사람의 편지 내왕은 퇴계가 세상을 뜰 때까지 무려 13년간에 걸쳐 지속됐다. 서로의 빛나는 정신을 감지한 두 사람에게 나이나 직위 등 세속적인 통념은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평생을 학생이라 자부하던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자기완성'이라는 숙제는 대학자나 청년학자 모두에게 절실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고봉은 퇴계의 학문적 권위에 눌리지 않고 예리하게 자신의 논지를 주장하면서도 인간적으로는 대선배에 대한 깍듯한 예우를 잃지 않았다. 때로 자신의 신상 문제를 숨김없이 토로하며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고봉의 나이 44세 때 퇴계가 죽자 고봉은 실성한 사람처럼 통곡하면서 그의 묘 앞에 묘갈명을 써서 바쳤다. 경상도 안동에 살았던 퇴계와 전라도 광주에 살았던 고봉의 아름다운 관계는 오늘날 영·호남 지식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김재창 기자 char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