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황동규(서울대 영문학과 교수.65)씨가 신작 시집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문학과 지성사刊)를 냈다. 이번 시집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라는 한 줄짜리 저자 서문. 이는 시집의 제목으로 그대로 사용됐다. 서문에 밝혀 놓은 이 글귀는 노년에 접어든 시인의 겸허한 자기고백으로 들린다. 삶이 치밀한 인과율에 얽혀 있음을 인식했다 할지라도 시인 스스로는 허술한 빈 자리를 찾고자 했고, 깨달음마저도 온전치 못했음을 밝힌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이번 시집은 삶과 문학에 통달한 노시인의 넉넉한 마음과 자유자재하는 정신으로 가득하다. 삶과 죽음에 대한 초월의지도 여러 시편에 깃들어 있다. 시인은 '황해 낙조'에서 "오늘 태안 앞바다 낙조는 / 서쪽으로 갈매기 한 떼를 날리며 / 바다 위에 / 한없이 출렁이는 긴 붉은 카펫을 깔았다"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엿본 순간조차 시적 황홀경에 빠져든 모습을 보인다. '부석사 무량수전에는 누가 사는가?'라는 시에서는 "새벽 봉황산 / 어둠 막 흔들렸으나 빛 채 배어들기 전 / 돌계단 디디며 헛디디며 안양루 오르는 길의 / 이 어둠도 빛도 아닌 / 그렇다고 빛 아닌 것도 아닌, / 아 어찌할 거나 / 혹 사후(死後) 세상 빛깔이 이렇지나 않을까, / 조금만 흔들어도 금시 생시가 다시 태어날"이라며 생사의 벽을 허문다. "게처럼 꽉 물고 놓지 않으려는 마음을 / 게 발처럼 뚝뚝 끊어버리고 / 마음 없이 살고 싶다. / 조용히, 방금 스쳐간 구름보다도 조용히"('쨍한 사랑노래' 중), "흔들어도 안 터지는 휴대폰/주머니에 쑤셔 넣고 걷다 보면 / 면허증 신분증 카드 수첩 명함휴대폰 / 그리고 잊어버린 교통범칙금 고지서까지 / 지겹게 지니고 다닌다는 생각!"('탁족' 중) 등에서도 현세의 짐을 덜어내려는 시인의 마음이 전해온다. "예수는 33세로 어느덧 세상 떠나고 / 이젠 어쩔 수 없이 / 80세까지 겨웁게 황톳길 걸어 적멸한 / 불타의 뒤꿈치 좇아가는 길"이라고 적은 '아득타!'를 비롯해 '쿰브 멜라에 간 예수' '시스타나 성당 벽화 「최후의 심판」 앞에서 불타가' '예수와 원효'등은 기독교와 불교를 융화시킨 시정신을 보여준다. 장시 '풀이 무성한 좁은 길에서'는 산책을 하러 집을 나섰다가 돌아오는 과정을 묘사한 작품으로 삶과 예술에 대한 시인의 마음자세를 잘 드러내고 있다. "오래 벼른 일, / 만보 걷기도 산책도 명상도 아닌 / 추억 엮기도 아닌 / 혼자 그냥 걷기!"로 시작되는 이 시는 젊은 시절의 이상과 중년의 탐욕, 그리고 늙음과 죽음은 삶이 다다를 궁극적 지점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산책길에서 돌아온 시인은 "이제 길이 / 다시 집들 속으로 흘러 들어간다. / 양돈장이 나타나고 / 버려둔 밭이 나타나고 / 메마른 검은 시내가 나타나고 / 서로 인사 않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다"라며 무거운 마음을 감추지 않는다. 그러나 "다리를 건너다 한 사내에게/무심결에 인사를 한다. / 얼떨김에 그가 인사를 받는다. / 모르면서 서로 주고받는 삶의 빛, / 가다 보면 그 누군가 마음 슬그머니가벼워지는 순간 있으리"라며 '서로 인사 않는 인간들'과 소통하려는 것이야말로 현세를 뛰어넘을 수 있는 초월의지에 닿아있음을 드러낸다. 120쪽. 5천원. (서울=연합뉴스) 정천기 기자 ckchun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