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자리에 가면 생각이 나 배시시 웃음을 짓게하는 유머가 있다. 인기 개그맨 K의 입에서 칠팔 년 전 흘러나온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술자리에서 염두에 둘 몇 가지 행동지침.첫째,가장 술이 강한 사람의 옆의 옆자리를 잡는다. 너무 표나게 떨어져 앉으면 약한 모습으로 비치게 될뿐더러 느닷없이 날아오는 술잔을 피하기 어렵다. 둘째,맥주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으면 소주를,소주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으면 맥주를 마신다. 동일주종이면 고수들에 의해 마시는 양이 파악되기 쉽다. 셋째,건배를 하고 술을 마시기 일보 직전에 갑자기 생각이 난 듯 진지하게 말을 꺼내면서 슬며시 잔을 내려놓는다. 물론 상대 보다 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속도가 약간 느려야 상대만 술을 마시게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도저히 버티기 힘들 때는 최고수에게 정면 도전을 한다. "아줌마,여기 글라스 두 개만 주세요!" 이 잔을 마시고 쓰러지면 대부분은 이해해준다. 확실히 이 행동 지침은 효과가 있다. 하지만 술을 많이 마실 경우를 대비해 속풀이에 도움되는 대구탕집 몇 군데는 알고 있어야 한다. 술자리의 진정한 끝은 아침 해장국 집이니 말이다. 부산뽈테기(종로2가 옛 무과수제과 뒤,02-733-4633)=좁다란 골목을 걷다가 마주치는 20년 전통의 "부산 뽈테기(대구머리)"는 문인들과 영화인들의 사랑방이다. 투박한 뚝배기에 국물이 넘치도록 펄펄 끓여내는 뽈테기 탕은 몸을 움추리게 만들 정도로 뜨거워 보인다. 호호 불며 한 숟가락 국물을 넣으면 입과 식도를 지나 위까지 쓸어 내리는 뜨거운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잡 맛은 일체 느낄 수 없는 개운함이 몰려온다. 큼직하게 썬 파,무,마늘,대구 머리로 탕을 끓이고 소금으로 간을 했다는데 맛이 심상치 않다. 야채에서 우러나온 시원함과 대구머리의 개운함이 고스란히 국물에 녹아 있다. 건져 낸 대구 머리살이 바닥을 보일 즈음 밥을 말아먹는 것이 이 집 스타일.밥 한 공기를 뚝딱 비우고 남은 국물을 후룩후룩 마시면 거짓말처럼 속이 편안해진다. 시원한 국물을 못 잊어 하는 샐러리맨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자원대구탕(삼각지 로터리 평양집 옆 골목,02-793-5900)=20여년 전 삼각지의 작은 골목에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한 대구탕 골목의 명소.사실 이 골목 대구탕 집들의 맛은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재료며 찬의 차림새가 대동소이하고 탕의 기본인 대구 역시 수입냉동을 쓰기 때문이다. 그래도 짓궂게 고집을 피운다면 양과 서비스 면에서 "자원"의 손을 치켜올리고 싶다. 통통한 콩나물을 냄비 바닥 가득하게 깔고 머리,몸통,지라,고니 등을 차례로 올린 후 다진 마늘과 고추 양념장을 두른다. 향이 은은히 배도록 미나리를 촘촘히 덮고 끝으로 육수를 부어 손님상에서 끓여준다. 이 집의 대구탕은 걸쭉하고 맛이 진하다. 해장은 물론이고 속이 든든해진다. 해장의 첫째 조건은 맵지 않고 얼큰해야 한다. 쓰린 속을 쓸어 내리며 연신 "시원하다"를 외칠 수 있어야 탕으로서 자격이 생긴다. 생선살과 내장 그리고 야채를 다 먹고 나면 국물에 밥을 볶아 준다. 무한정 리필되는 동치미가 시원하다. 대원 대구탕(서소문 중앙일보 뒤,02-755-3811)=대구 한 마리로 매운탕,알탕,머리탕,지리탕을 만들어 내는 대구 전문 식당.주문과 동시에 가스 불에 올려지는 냄비며 찬이 소박하다 못해 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따라 나오는 아가미 젓과 무짠지는 맨입에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짭짤하다. 지루함을 피하려 몇 점 밥과 함께 넣다보니 어느새 공기가 움푹 패여 있다. 센 불에 올린 후 3~4분이 지나면 뚜껑이 들썩거리며 거품을 토해내는데 살포시 냄비 속을 헤치다 보면 보글보글 끓는 탕에서 대구의 향이 진동을 한다. 매운탕의 모양새는 여느 집과 별반 다르지 않지만 국물은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조미료 때문에 들척해지기 쉬운 것이 매운탕인데 이 집 탕은 개운하다. 내장도 비리지 않고 고소하다. 시계바늘이 11시30분을 가리키면 여지없이 까칠한 얼굴의 술꾼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까끌거리는 입과 속을 달래기 위해. 김유진.맛칼럼니스트.MBC PDshowboo@dreamwiz.com 김병언 기자 misa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