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양주(음식 담당)는 혜안·범승 스님,선덕(공부지도 담당)에 석천·명오 스님,다각(차 담당)에 휘묵·지수·동현 스님,명등(전기관리 담당)은 현조 스님…." 지난 18일 저녁 경북 울진 불영사(佛影寺) 천축선원(天竺禪院). 음력 10월 보름인 19일부터 석달간의 동안거(冬安居)에 참여하는 80여명 비구니 스님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동안거 결제(시작)를 하루 앞두고 안거 기간 중 지켜야 할 청규(규칙)와 소임(역할) 등을 논의하기 위한 대중공사(전체회의)다. 수십 명이 한 방에서 생활하자면 미리 규칙을 정하고 역할도 분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시간여의 대중공사 끝에 입승(立繩) 스님의 호명과 함께 소임을 받은 스님들은 "잘살겠습니다"라며 합장한 채 고개를 숙인다. 선방의 벽을 따라 둘러앉은 수좌들의 눈빛이 형형하다. 이제 각자의 소임을 적은 용상방(龍像方)을 선방 벽에 붙이면 '목숨을 내놓고' 달려드는 정진이 시작된다. 불영사는 신라 진덕여왕 5년(651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고찰이다. 천축산 봉우리의 관음상처럼 생긴 부처바위(佛影巖)가 절마당 앞 연못(佛影池)에 그림자처럼 비친다고 해서 불영사다. 지난 78년 선원장인 일휴 스님이 비구니 선원을 개설한 이래 전국에서 손꼽히는 수행도량으로 자리잡았다. 이번 안거에 참여한 수좌들은 이미 반 년 전에 방부(房付·참가신청서)를 냈다. 1천3백년 고찰의 전통에다 속세와 뚝 떨어진 첩첩산중이라 수행하기에 딱 좋은 환경이다. 이와 함께 수좌들을 이곳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천축선원의 엄한 수행가풍이다. "이곳 선방은 선불장(選佛場),즉 부처님을 뽑는 곳입니다. 그래서 선방에는 불상이 없고 가사와 포단(참선할 때 앉는 방석)뿐이지요. 선방에선 일체 묵언(默言)이며 행자를 포함한 산문 안의 모든 대중이 참선해야 합니다." 주지 일운 스님의 설명이다. 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도 이번 동안거 결제법어에서 "사방으로부터 함께 모여들어(十方同共聚) 모두 무위의 법을 배운다(個個學無爲) 여기가 바로 부처를 뽑는 시험장이니(此是選佛場) 마음을 비워야 급제하여 고향에 돌아가리라(心空及第歸)"고 했다. 안거 기간에는 산문 밖으로 일절 나갈 수 없다. 선방 대중은 하루 14시간 이상 정진하며 원할 경우 24시간 용맹정진도 할 수 있다.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의 청규에 따른 울력은 생활 속의 하심(下心·겸손)과 인욕을 배우는 과정이다. 올 겨울에도 직접 농사지은 배추 3천여 포기로 김장을 마쳤다. 여느 사찰처럼 여신도들에게 공양간(부엌) 일을 맡기지 않고 스님들이 직접 한다. "산문 안에 사는 것 자체가 수행이지요. 모든 편안함과 욕망을 끊고 청정하게 사는 일이 쉽지는 않거든요." 일운 스님의 설명이 긴 여운을 남긴다. 간절한 의심 속에서 화두를 타파해나가는 것,이를 통해 수좌들은 고통의 원인인 집착을 버리고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갈 것이다. 대웅전 앞마당에 내려서니 둥근 달이 선원 지붕 끝에 걸려 있다. 울진=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