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도쿄에 들른 도산 안창호의 강연을 듣고 깊이 감동한 이광수는 이 때부터 기독교에 관심을 가진다. 1907년 최남선이 서울로 돌아간 뒤 그는 톨스토이.바이런 등의 작품을 읽으며 서구의 문예 사조에 심취한다. 또 홍명희.문일평 등과 함께 소년회를 만들어 회람지 "소년"을 펴내고 여기에 시와 논설을 싣는다. 1909년에는 장편 "노예(奴隸)"를 쓰고 얼마 뒤에는 메이지학원의 동창회보 "백금학보"에 일어로 발표한 "사랑인가"가 일본 잡지에 실린다. 이로써 이광수는 재일 유학생 사이에 문사로 꽤 알려지게 된다. 메이지학원 중학부를 졸업하고 다이이치고등 예과에 합격하여 입학 준비를 하던 1910년 초 부모가 죽은 뒤 누이동생을 돌봐주고 어려운 살림에 학비까지 보태주던 조부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는다. 조국에 돌아온 이광수는 곧 상경하여 신문관의 최남선을 찾는데 두 사람은 날 새는 줄 모르고 그 동안 쌓인 정치와 문학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그러고서 곧 '소년'에 단편 '어린 희생'과 '헌신자'를,'대한흥학보'에는 단편 '무정'과 평론 '문학의 가치'를 싣는다. 또 그는 3월과 4월에 걸쳐 '대한흥학보'에 어린 몸으로 시집가서 남편과 시부모에게 구박을 받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자살하고 마는 조혼에 희생당한 구식 여성 문제를 다룬 단편 '무정'을 싣는다. 조부상을 치른 이광수는 오산학교 설립자인 이승훈의 초청으로 교편을 잡으며 둥지를 트는데 8월 들어 '소년'지에 장사를 하여 모은 돈으로 교육 사업에 헌신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헌신자'를 발표한다. 그러고는 실제로 오산학교에서 야학을 열어 계몽 운동을 벌이던 중 8월 29일 비운의 한·일합방 소식을 듣는다. 이광수는 망명 도중 오산에 들른 신채호와 만나게 되고 최남선과는 '조선 역사' 5부작을 계획한다. 1911년에는 이승훈이 '105인 사건'으로 구속되자 학감으로 취임해 오산학교를 실질적으로 떠맡는다. 기독교계인 이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생물 진화론과 톨스토이를 가르친 것이 빌미가 되어 선교 교사와 의견 충돌이 일어나고 이로 말미암아 4년 만에 교직에서 스스로 물러난다. 1915년 그는 최남선과 인촌 김성수의 독려로 9월 일본 와세다대학 고등예과 2학기에 편입하여 다음해 7월에 졸업한다. 이어서 1917년 3월에 같은 대학 철학과에 입학하는데 이광수 이후로 이 학교의 영어 강독 시험에서 만점을 받은 사람이 거의 없다고 알려질 만큼 뛰어난 성적을 올린다. 그렇다고 학업에만 매달린 것이 아니라 틈틈이 '대한매일신보'에 계몽적 소설이나 논문을 게재하는가 하면 조선학회의 월례회에서 '우리 민족성 연구' 같은 학술논문을 발표하기도 한다. 1916년 12월 일본에서 대학 진학을 준비하고 있던 그에게 대한매일신보사로부터 전보 한 통이 날아든다. 신년 연재 소설을 청탁받은 것이다. 이광수는 이미 써둔 원고 '영채(英彩)'를 다듬어 새 제목을 달아 서울로 보낸다. 이것이 1917년 정월 초하룻날부터 대한매일신보를 화려하게 장식한 장편 연재소설 '무정'이다.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은 '무정'이 같은 해 6월 1백26회로 끝나자 그는 소설 집필에 한층 더 박차를 가한다. 7월 '청춘'에 단편 '어린 벗에게'를,'매일신보'에 장편 '개척자'를 이듬해 3월까지 연재하고 단편 '윤광호'도 곁들여 발표한다. 1918년 7월 와세다대학 철학과 2학년 학기말 시험에서 그는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진급한다. 그런데 이광수는 이것으로 학업을 접게 된다. 한 여자와 베이징으로 애정 행각을 떠나고 만 것이다. 이미 그는 1910년 고향 정주에서 중매로 결혼을 한 몸이었다. 그러나 애정이 없어 겉돌던 차에 유학 생활로 더욱 아내와 멀어지고 결국 1918년 9월에 이혼을 하기에 이른다. [ /시인·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