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구와 분석에 길들여진 탓일까. 이른바 "먹물"들은 사랑에도 이런 식이다. 상대를 꼼꼼히 분석한 뒤 자신의 영혼과 일치하는 코드를 찾아낸다. 그들의 사랑은 관념으로 완성된다. 섹스는 때때로 하찮은 것이다. 영국작가 A.S 바이어트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멜로 "포제션"(닐 라부트 감독)은 지식인의 사랑을 세필화로 그려냈다. 영국 빅토리아시대 계관시인 랜돌프 애쉬와 그의 행적을 좇는 현대 학자들의 사랑이 연결돼 있다. 기네스 펠트로와 아론 에크하트가 현대의 학자역을 맡아 지식인의 사랑을 연기한다. 아귀가 꼭 맞는 각본,맛깔스런 대사,근대와 현대를 넘나드는 정서의 흐름이 깔끔하게 조형돼 있다. 미국계 학자 롤랜드 미첼(아론 에크하트)이 영국의 대학 도서관에서 빅토리아시대 계관시인 랜돌프 애쉬가 레즈비언 여류시인 크리스타벨 라모트에게 보낸 연서를 발견한다. 랜돌프 애쉬는 아내에 대한 열정을 남긴 연시로 유명한 애처가. 그가 불륜을 저질렀다면 중대한 발견이다. 롤랜드는 크리스타벨을 연구하는 학자이자 그녀의 후손인 베일리 모드(기네스 펠트로)와 함께 사실확인을 위해 여행을 떠난다. 두 주인공은 지식인의 체취를 풍긴다. 모드는 단정한 복장과 명료한 말투로 교육받은 여성임을 알려준다. 미첼은 푸석푸석한 머리,꺼치름한 수염,손에 잡히는 대로 입은 듯한 복장이지만 반짝이는 눈빛과 다소 차게 느껴지는 표정에서 모범생의 이미지가 읽혀진다. 이들의 감정의 기복은 애쉬의 흔적을 찾아가는 지적편력과 교묘하게 일치한다. 애쉬와 라모트의 애정이 깊어질때 미첼과 모드의 감정도 고조된다. 애쉬와 라모트의 갈등이 증폭될 때 미첼과 모드의 관계도 수렁에 빠진다. 주인공들은 과거 인물들을 거울삼아 자신들의 모습을 조금씩 찾아가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의 주인공들이 서로에게 감전되는 요인은 자신의 영혼을 상대가 가장 잘 이해한다는 점이다. 애쉬는 자신의 시세계를 알고 있는 라모트에게 끌린다. 모드와 미첼도 공통의 관심사를 연구하면서 가까워진다. 그들에겐 섹스는 부차적인 문제다. 애쉬에게는 아내가,라모트에겐 동성연애 상대가 따로 있고,모드도 섹스파트너가 있다. 미첼은 모드의 출생비밀을 안 뒤 그녀와 성관계를 맺는다. 그녀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 완벽히 정리된 후의 일이다. 그가 모드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극의 전반부와 중반부에서 섹스관계를 가졌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겐 되려 냉정해져.사랑때문에 그에게 모든 것을 빼앗길까 두려워"라는 모드의 말에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합이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결합보다 한층 어렵다는 함축된 뜻이 담겨 있다. 이야기는 요크셔와 랭카스터 등 고풍스런 영국저택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빅토리아시대의 상황을 묘사하는데 치중하기 보다는 당대의 정서를 포착해 현대와 포개 놓는데 주력한다. 25일 개봉,15세이상.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