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초등학교 총각선생(내 마음의 풍금),북한군과 우정을 나누는 사병(공동경비구역), 첫사랑의 순정을 간직한 고교선생(번지점프를 하다). 그동안 영화속 이병헌(33)의 이미지는 "순수"였다. 그러나 1년반만에 출연한 박영훈 감독의 영화 "중독"(25일 개봉.15세 이상)에선 순수의 대척점에 있는 인간형을 연기한다. "중독"은 "번지점프를 하다"처럼 영혼을 소재로 삼은 팬터스틱멜로지만 구성과 캐릭터에선 판이하다. "'번지점프를 하다'는 따스한 느낌이었지만 이번엔 유리조각위를 걷는 기분이었어요." 카레이서 황대진과 그의 형 호진(이얼)은 비슷한 시각에 자동차 사고로 식물인간이 된다. 1년만에 병상에서 깨어난 대진은 자신을 호진으로 착각하며 형수(이미연)에게 다가선다. 그는 타인의 영혼을 받아들였다가 나중엔 반전을 통해 그것을 뒤집는다. "내 배역의 진실성을 어느 정도까지 보여줘야 할지 고민이었어요.배역의 리얼리티를 강조하면 반전효과가 감소되고,그렇다고 리얼리티를 배제하면 관객의 공감을 끌어낼 수 없으니까요." 대진의 육체로 호진의 혼을 표출해야 하고 극중 다른 인물이나 관객,심지어 자신까지 속여야 하는 상황에 봉착하는 것이다. 회복후 그는 형수의 칫솔에 치약묻혀주기,음식만들기,화초에 물을 줄때 허리에 손을 얹기 등 형의 버릇을 재현한다. 형수와의 첫 만남의 순간까지 기억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과의 힘겨운 싸움을 벌인다. 인간은 타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는 순간 부끄럼이나 어색한 감정을 갖기 마련이다. 배우란 직업은 이런 경험에 더욱 자주 노출된다. 하지만 이병헌이 연기한 대진은 형수와 여자친구(박선영) 등 극중 배역들과 관객들로부터 의혹의 시선을 줄곧 받는 "이중고"를 경험한다. "대진은 겉으로는 무표정하지만 속으로는 흥분과 긴장이 넘치는 캐릭터지요.극도의 불안감으로 안면근육이 가늘게 떨릴 정도로 미세한 반응을 나타냅니다" "중독"의 의미는 이야기가 끝날 무렵에야 수면위로 떠오른다. 연인을 위해 자신의 존재를 던져 버리거나,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과 함께. 형수를 향한 "금지된 사랑"에서 관객들은 기쁨과 두려움이란 사랑의 양면성을 체험한다. 그리고 "사랑은 진정한 의미에서 사람을 성실하게 만든다"는 명제의 진위에 대해서도 한번쯤 생각하게 된다. "관객들은 영화를 본 후 다양한 반응을 나타낼 거예요.어떤 사람들은 주인공의 사랑을 수긍할 수 없을 것이고,또 어떤 사람들은 받아들일 겁니다."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