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나먼 쏭바강' '우묵배미의 사랑' 등으로 친숙한 중진작가 박영한씨(55)가 새 소설 '카르마'(이룸, 7천8백원)를 냈다. 지난 96년 장편소설 '장강(長江)'을 발표한 이후 6년만의 신작이다. '카르마'는 그의 과거 작품과는 다르다. 박씨의 이전 작품 곳곳에서 감지되던 역사와 현실, 사회에 대한 의식은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우리 인간존재는 어디에서 왔으며 무한한 우주 안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이승에서의 삶을 끝내면 어디로 갈 것인지와 같은 보다 근원적인 문제에 천착하고 있다. '카르마'에 대해서는 "유한한 삶을 영위하면서 덧없이 사라져 가는 '우주내 존재로서의 막막한 슬픔'을 읊은 서정시"라는 게 작가 자신의 설명이다. 집필 동기에 대해선 "근래 7∼8년간 현실정치라든지 인간들이 벌이는 갖가지 일들로부터 관심이 멀어졌다. 보다 심원하고 유장한 세계를 향한 그리움이 이 작품이 나온 배경"이라고 말한다. 소설은 작가 자신이 몇년 전 작품 구상을 위해 강원도 오지로 여행을 떠났던 경험에서 비롯된다. 농주나 한잔 마시려고 한 귀틀집에 들어갔다 아예 눌러앉아 겨울 한철을 보낸 것이 이 작품의 모티브다. 팔다리가 절단돼 바깥 출입을 거의 못한 채 집에서 술로만 소일하는 박씨에게서 작가는 반평생 동안 불구의 몸으로 처참한 삶을 살다 간 어머니를 떠올린다. 네안데르탈인 같은 외모에다 제대로 된 말 한 마디조차 못하는 정신박약증 환자인 박씨의 형은 작가 이복형의 환생태로 묘사된다. '나'는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몽당팔의 사내는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나'는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할 수 없는 상황에서 팔다리 없는 박씨를 등에 업은 채 말한다. '대체 여기는 어디인가. 아아, 추위는 바로 바깥에서 우리를 물어뜯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고. 운반 수단을 잃은 나는 이 번거로운 짐짝을 과연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번거로운 짐짝과도 같았던 가족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로도 들리는 이 말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도리와 책임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김재창 기자 char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