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1892~1950)는 현대 한국 문학의 선구자로서 그만큼 많은 칭찬과 비난을 동시에 받으며 한 시대를 풍미한 사람은 달리 찾기 어렵다. 이광수는 '만질수록 덧나는 상처'(김현)다. 그렇지만 한국 문학사는 이광수를 빠뜨리고는 기술될 수 없다. 그가 한국 문학사에 남긴 발자취가 크고도 뚜렷하기 때문이다. 최남선이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서 가족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데 반해 이광수는 변방의 몰락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스스로 생계를 책임지며 세파를 헤쳐나간다. 고아라는 취약하고 불우한 배경 속에서도 춘원은 명민한 머리와 피나는 노력으로 한국 문학의 선구자, 민족의 지도자로 우뚝 선다. 그러나 우리 현대 문학사가 낳은 이 걸출한 인물은 동시에 변절자 또는 민족 반역자라는 오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선각자 이광수를 현대문학의 흠 많은 아버지로 갖게 된 것은 우리 현대문학사에 내장된 불행이다. 1940년대 초엽 어느 겨울날의 일이다. 덕수궁에서 도쿄 유학생들의 미술 전람회가 열렸다. 마침 겨울 방학을 맞아 일본에서 돌아와 서울에 있던 20대 초반의 문학 청년 김춘수(金春洙)는 그 전람회장에 갔다가 뜻밖에 이광수를 만난다. 춘원은 여러 학생에게 둘러싸여 나직한 목소리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춘원에 대한 첫 인상은 까만테 안경을 낀 점잖고 준수한 신사의 그것이었다. 얼굴 생김새는 동글납작하고 폐를 앓고 있던 터라 안색은 파리한 편이었다. 그 날 김춘수는 몇몇 학생과 함께 효자동에 있던 이광수의 집까지 따라간다. 아내 허영숙의 산부인과 병원에 붙어 있던 춘원의 집 거실에서 차까지 얻어 마시고 문학 이야기를 나누던 김춘수 일행은 정오 사이렌이 울리면서 눈앞에 펼쳐진 충격적인 장면과 맞닥뜨린다. 당시에 일제는 정오 사이렌이 울리면 행인들에게 걸음을 멈추고 그 소리가 멎을 때까지 황군(皇軍)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비는 묵도를 올리도록 했다. 그런데 거실에 있던 춘원과 차를 내온 춘원의 딸이 정오 사이렌이 울리자 묵도를 올리는 것이 아닌가! 이광수는 1892년 2월 27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대소과(大小科)에 실패하고 술에 기대어 여생을 탕진하고 있던 이종원의 장남으로 태어난다. 아명은 보경(寶鏡)인데 명치학원 중학부 졸업생 명부에는 이 이름으로 올라 있다. 다섯 살 때 한글과 '천자문'을 깨치고 여덟 살 때에는 '사략' '대학' '중용' '맹자' '논어' '고문진보' 등과 같은 동양 고전을 두루 섭렵할 만큼 신동이던 그는 생계를 돌보지 않는 아버지 때문에 어린 몸으로 산에 가서 나무를 하거나 궐련초를 팔아 학비를 보태며 서당에 다녔다. 열 살 나던 해 나라에 창궐한 호열자로 부모를 한꺼번에 여의고 갑작스럽게 고아가 된 소년 이광수는 절망감에 휩싸여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제 운명에 드리워진 불행의 그림자에 치를 떨던 소년은 사당에 불을 질러 홍패(紅牌).문적(文籍).위패(位牌) 등을 태워버린 뒤 고향을 버린다. 이윽고 외가와 재당숙 집 등을 전전하며 떠돌이 생활을 하던 그가 한 접주의 인도로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 보국안민지대도덕(保國安民之大道德)이라는 이념에 감명을 받아 동학에 입도한 것은 1903년께다. 교도가 된 그는 정주 지방 동학도 박찬병 대령의 집에서 기숙하며 도쿄와 서울에서 오는 문서를 베끼는 서기 노릇을 한다. 1904년 러.일전쟁으로 한층 심해진 동학에 대한 압박을 피하여 서울로 온 이 조숙한 천재는 일진회와 접하며 개화 사상에 눈을 뜬다. 그는 삭발을 하고 '일어 독학'을 암송하는 식으로 혼자 일본어를 익혀 일진회가 세운 광무학교의 전신인 소공동 학교에서 잠시 일본어 교사 노릇을 한다. 곧 광무학교가 정식으로 설립되자 이번에는 학생 신분으로 일본어와 산술을 다시 배운다. 교사이자 학생 신분으로 지낸 광무학교 시절의 경험은 이광수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암시한다. 1905년 8월 일진회의 유학생으로 뽑혀 일본 유학길에 오른 그는 이듬해 메이지학원 중학부 3학년에 편입학한다. 이 시기에 이광수와 더불어 20세기 초 조선의 삼대 천재라고 일컬어지는 최남선.홍명희 등과 교유하며 문학 이야기를 나눈다. [ /시인.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