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연구자 미야지마 히로시(宮島博史.54)씨는 '식민지 근대화론자'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각인시킨 것은 1991년에 발표된 그의 단행본 「조선토지조사사업사 연구」가 결정적이었다. 미야지마는 이 책에 쏟아진 비판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이 책 출판 직후 한국에) 오자마자 내 책에 대해 한국학계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비판의 주된 내용은 토지조사사업을 근대화를 위한 사업으로 평가한 내 입장에 대한 것이었다. 이런 비판은 나에게 그야말로 뜻밖이었다". 미야지마에게 덧씌워진 '식민지 근대화론'이란 간단히 말해 일본의 식민통치가 한국 근대화를 이룩한 원동력이었다는 논리다. 한마디로 일제미화론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는 '식민지 근대화론자'인가? 미야지마의 반박은 이렇다. "내가 주장한 것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 한국의 토지제도를 근대화시킨 것이었지만 그것은 일제의 혜택이 아니라 조선시대에 벌써 수조권적 토지지배가 해체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제가 그러한 정책을 실시한 것은 어디까지나 더 효과적인 식민지 지배를 위한 것이었지 선의에 의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고 생각했는데, 일제미화론이라는 비판을 받게 된 것이다". 그의 주장을 정리하자면,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 한국 토지제도를 근대화시킨 것은 분명하지만, 그러한 토대는 조선시대 토지제도 자체가 이미 근대화에 도달할만큼 성숙돼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함께 미야지마는 토지조사사업이 근대성이라는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식민지성이 내재돼 있다고 분명히 못을 박았다. 그럼에도 그는 이 단행본 이후 지금까지 여전히 '식민지근대화론자'라는 딱지에서 자유롭지 못한 형편이다. 그가 도쿄대 교수직을 박차고 지난 5월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전임교수로 자리를 옮겼을 때 국내 학계가 싸늘한 반응을 보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과연 미야지마는 '식민지 근대화론자', 혹은 '일제 미화론자'인가? 「역사비평」 이번 가을호 '토론광장'에 미야지마가 기고한 글 '내가 보는 조선후기상(像)과 토지조사사업 연구'는 그를 향한 각종 비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어떠하며 그가 구축하려는 동아시아 역사상이 무엇인지 잘 엿보게 하고 있다. 이 글을 관통하는 미야지마 반론의 핵심은 "반대론자들이 나를 식민지근대화론 자로 만들었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실제 그가 지금껏 내놓은 연구성과를 검토할 때 그를 이렇게 몰아붙이는 것은 대단한 곡해라는 느낌이 짙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그의 동아시아 담론이 '소농(小農) 사회론'이다. 1994년 그가 처음 제창한 이 이론에 대해 미야지마는 "최대 목적은 동아시아 전통사회의 모습과 근대 이행과정 특징을 파악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이 담론은 한.중.일 동아시아 3개국 근대는 '소농'(小農)을 기반으로 한 사회라는 것이다. 서구 유럽과는 달리 소농에 대비되는 거대 토지귀족이 없다는 점을 동아시아 근대의 가장 큰 특징으로 꼽고 있다. 조선시대 후기 토지대장인 양안(量案)과 호적대장에 양반과 평민이 나란히 토지소유자로 기재돼 있음을 주목한 그는 토지귀족이 없었다고 단언한다. 토지귀족이 없다는 것은 왕으로 대표되는 국가권력에 대항할 수 있는 존재가 없다는 의미다. 이러한 사정, 다시 말해 거대 토지귀족 부재 현상은 세부적 차이가 있을지언정 큰 틀에서는 중국이나 일본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서구 유럽사회가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의회를 태동시킨 귀족이나 영주와 같은 국가권력 대항 주체가 동아시아에는 없으므로 양반이나 민중 모두 국가권력에 직접 노출되어 정치적 통제를 받기 마련이다.토지조사사업만 해도 그것이 비교적 순조롭게 성공한 원인이 국가권력에 맞설 토지귀족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소농사회론'은 자연히 '봉건제 부재론'으로 연결된다. 서구사회에서 근대의 이행 전단계인 봉건제가 동아시아에는 없었다는 것이다. 미야지마는 토지귀족 부재 원인으로 주자학 이데올로기를 지목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소농사회론, 혹은 봉건제 부재론이 동아시아 근대화와는 어떠한 맥락을 이룰까? 미야지마는 한국을 예로 든다. "정치적으로는 체제 변혁에 실패했는데도, 경제적으로는 토지조사사업이라는 커다란 변혁이 비교적 순조롭게 실시되었을 뿐 아니라, 그 후의 경제적, 사회적 변화도 아주 급속하게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 한국은 국가권력에 대항력을 갖는 토지귀족이 없는 소농을 기반으로 한 사회였기 때문에 급격하게 경제적, 사회적 발전을 이룩했다는 것이다. 이쯤이면 미야지마는 '식민지 근대화론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를 그렇게 집중비판한 국내 '내재적 발전론'보다 더한 '내재적 발전론자'로 보아야 할 듯 싶다. 내재적 발전론이란 조선사회는 그 스스로 근대화하기 위해 자본주의적 맹아(萌芽)를 키우고 있었는데 그만 일본 제국주의로 대표되는 외세에 의해 그 싹이 잘리면서 왜곡된 근대화로 나아갔다는 논리로 요약된다. 다만, 이른바 내재적 발전론자들이 (자발적) 근대화를 긍정적으로만 바라보았던데 비해 미야지마는 그것이 얼마나 억압적이며, 어두울 수 있는지 아울러 짚고 있다는 점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taeshi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