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창간된 한 시전문 계간지가 시인과 평론가 1백명에게 지난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시인 10명을 선정해달라는 설문을 낸 적이 있다. 그 조사에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첫 번째 꼽힌 시인은 다름아닌 김소월(金素月)이다. 올해로 꽉찬 탄생 1백주기를 맞은 소월은 한국 현대시인의 대명사이다. 그는 명실공히 이 땅의 민중의 한과 슬픔으로 덧난 상처를 보듬어 안은 민족시인이다. 그가 생애에 남긴 단 한 권의 시집인 "진달래꽃"은 무수히 많은 유.무명 출판사에서 숱한 판본으로 거듭 출간되었다. 그의 시집은 아직 공식적으로 집계되지 않았지만 세월과 무관하게 이 땅의 영원한 베스트셀러다. 평론가 김병익에 의하면 김소월은 서구(西歐)의 데카당적 시상(詩想)과 이국적(異國的)인 언어형식만이 풍미하던 시대에 돌연히 나와 토속(土俗)의 이미지와 전통적인 7·5조의 민요풍 리듬 속에 동양(東洋)의 심상(心象)을 최고의 격조로 수용한 시인이다. 평론가 송희복은 "그는 일제 강점기의 민족적 삶의 갱생을 부르짖은 경륜가가 아니었다. 당대의 표준적 생활수준으로부터 그닥 벗어나지 않았던 한 사람의 농민,한 사람의 식민지 잔맹(殘氓)에 불과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변방의 이름 없는 소지식인,얼치기 농민,저 북방의 소도시에서 신문지국을 경영하며 비관과 술로 서서히 자신의 생명의 불을 소진시켜가던 이 평범한 청년이 어떻게 우리 시대 최고의 높이에 도달한 민족시인으로 태어날 수 있었을까. 1934년 12월 하순 평북 정주의 산자락에 자리잡은 무덤들 주변을 한 남자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삼십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남자의 얼굴에는 깊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고 초췌해 보였다. 그는 간략한 성묘를 마친 후 한 무덤가에 앉아 무덤에 뿌리고 남은 술을 천천히 마셨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남자는 허청거리며 산길을 내려갔다. 내려오는 길에 그는 장에 들러 아편을 구했다. 그리고 서둘러 귀가해서 아내와 함께 밤늦도록 술을 마셨다. 그는 아내가 술에 취해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 장에서 구해 온 아편을 삼키고 잠에 빠져든다. 그 다음날인 1934년 12월 24일 새벽에 그 남자는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소월이 우리에게 보여준 마지막 모습이다. 소월의 본명은 김정식(金廷植)으로 1902년 9월 7일에 태어났다. 그의 고향은 평북 정주군 곽산면 남서동으로 그곳은 일찍부터 공주 김씨들만 백여 호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다. 소월은 그 정주의 공주 김씨 문중의 장손으로 출생한다. 그의 부친 성도(性燾)는 소월이 두 살 나던 해인 1904년 철도 공사장의 일본인들과 시비가 붙어 집단 폭행을 당한다. 당시 정주와 곽산을 잇는 철도공사에 일본 낭인(浪人)들이 투입되는데 김성도는 음식 선물을 말등에 싣고 처가 나들이를 나섰다가 그것을 뺏으려는 이들과 싸움이 붙었던 것이다. 말잔등에 거꾸로 매달려 돌아온 그의 부친은 근 한달 동안 의식불명 상태로 있다가 깨어난다. 그 뒤로 정신이상자가 되어 평생을 폐인으로 보내게 된다.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난 것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혼자 구석진 곳에서 무언가를 소리 없이 중얼거리고 있는 폐인 아버지는 소월의 운명이 품어안은 원초의 어둠이었다. 성인이 된 후 소월의 비사교적인 성격과 폐쇄적인 내향성은 그 어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소월의 유년기 인격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숙모 계희영(桂熙永)과의 만남을 빼놓을 수 없다. 신학문에 눈을 뜬 아버지 덕분에 일찍부터 언문을 깨우쳐 고대소설과 설화들을 탐독했던 계희영은 소월이 만 세살 되던 해 공주 김씨 문중으로 들어왔다. "신부인 나는 큰 머리를 하고 은봉채를 꽂은 채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데 개구멍 바지를 입고 눈은 샛별같이 반짝이며 네 살짜리 사내아이가 새색시 앞으로 다가앉으며 '야,새엄마다'라고 반색을 했어.사내아이는 치맛자락 가까이 다가앉아서 얼굴을 자세히 들여보다가 옷도 한번 쓸어보고 종일 내 곁에서 떠나지 않았어"라고 숙모 계희영은 소월과의 첫만남을 회고한다. 그 후 소월은 틈만 나면 숙모의 곁으로 달려가 옛날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댔다. /시인·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