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월혁명 뒤 나라 곳곳에서는 교원노조(敎員勞組)가 결성된다. 그러나 이듬해 5.16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는 혁명 검찰부를 구성하고 교원노조 운동을 용공으로 매도하며 소속 간부들을 잡아들인다. 이때 소설가 이병주(李炳注,1921~1992)는 교원노조 고문이라는 명목으로 잡혀 들어간다. 사실은 이병주가 주필로 있던 "국제신보"에 "조국의 부재(不在)" "통일에 민족 역량을 총집결하라"는 제목의 한반도 영세 중립국화를 주장한,시대를 너무 앞질러 간 논설을 써서 싣는 바람에 걸려든 것이다. 이 일로 이병주는 군사 정권의 이른바 혁명재판소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2년 7개월을 복역한 뒤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온다. 출소 직후 이병주는 수감 생활을 하며 구상한 소설을 1주일 만에 원고지 5백여 장 분량의 중편 소설로 써낸다. 이병주의 등단작이 된 "소설 알렉산드리아"는 뜻하지 않은 수감 생활에 대한 일종의 보상인 셈이다. 마흔네 살이 되던 해에 첫 소설을 발표한 이후 왕성한 필력을 과시한 이병주는 '관부연락선'(1972) '예낭풍물지'(1974) '망명의 늪'(1976) '지리산' '바람과 구름과 비'(1978) '산하'(1979) '행복어사전'(1980) '소설 남로당'(1987) 등의 문제작을 잇달아 내놓으며 작가로서 입지를 굳힌다.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월광(月光)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는 말을 즐겨 하던 그는 작가란 햇빛에 바래진 역사를 새로 쓰는 복원자, 준엄한 사관(史官)이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모든 역사는 승자들을 위한 기록이다. 따라서 당연히 역사는 승리자 중심으로 기술되고 결과만 따지게 된다. 그러나 문학은 역사가 빠뜨리고 간 것을 챙기고 메워준다. 무명의 패배자에게도 발언권을 주고 결과만이 아니라 동기도 중요하게 조명한다. '역사의 그물로 파악하지 못한 민족의 슬픔의 의미를 모색하는 것'을 자신의 문학적 지향으로 삼은 이병주는 철저한 자료 수집과 취재에 바탕을 두고 한국 현대사를 소설의 공간에서 충실하게 되살려낸다. 1970년대 중반 문인들이 모인 어느 술자리.한 젊은 소설가가 술기운을 빌려 이병주에게 대뜸 묻는다. "선생님, 빨치산 하셨지요?" 적당히 술이 올라 기분이 좋았던 이병주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버린다.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이병주에게 쏠린다. 짧은 침묵이 흐르는가 싶더니 이병주가 벌떡 일어선다. "내가 빨치산 한 걸 네가 봤어? 증거 있으면 대보라구,이 자식아!" 이병주가 들고 있던 술잔이 어느새 젊은 작가의 얼굴을 향해 날아간다. 말 한 마디 잘못 꺼낸 죄로 뜻하지 않은 봉변을 당한 젊은 작가가 묵묵히 있자 이병주는 분이 덜 풀린 듯 후배 작가의 멱살을 움켜잡는다. 주위 사람들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아 가까스로 더 큰 불상사로 번지지는 않는다. 이병주는 자신에게 평생 동안 따라다닌 좌익 혐의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예민하게 반응한 것이다. 그의 사상적 편향에 대한 의심 때문에 그는 숱한 오해와 불이익을 당하며,그의 내면에는 이에 대한 강박증적 피해 의식이 깃들이게 된다. 그가 숨진 뒤 한 유력 월간지에 마치 특종처럼 '나는 빨치산이었다'라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그 기사대로라면 6·25 직후 해인사 경내에 피신해 있던 이병주는 그 곳을 습격한 빨치산 부대장 김간도를 만나고,일본 메이지대학 동창인 그를 따라 지리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한다. 그러나 그 기사는 오보였다. 그의 좌익 전력은 인민군 점령 치하에서 연극동맹을 맡은 것이 전부이고,그 어쩔 수 없는 '부역 행위' 때문에 진주경찰서에 자수해 불기소 처분을 받고 풀려난다. 이병주의 삶은 일제의 식민지 교육,태평양전쟁,강제 징병,해방 공간에서 불거진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갈등,한국전쟁,부역,남북 분단,5·16정변,필화 사건으로 말미암은 감옥살이 등 수난과 질곡의 한국 현대사를 고스란히 끌어안고 있다. "해방과 6·25를 전후하여 지리산에서는 2만여명이 죽어갔습니다. 파르티잔과 군경 토벌대인 이들은 대부분 젊은이들이었지요.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났든지 간에,또 파르티잔의 상당수가 잘못 선택한 길을 갔든지 간에 그들의 죽음은 민족과 시대의 관점에서 다시 조명되어야 합니다." < 시인·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