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7월 14일자 신문을 펴든 문학인들은 1면 톱기사로 실린 "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괴대남공작단 사건"의 전모와 함께 연루된 사람들의 이름이 실린 것을 보았다. 그들은 어리둥절한 채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엔 뜻밖에도 시인 천상병(千祥炳,1930~1993)의 이름이 올라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재불화가 이응로(李應魯),재독작곡가 윤이상(尹伊桑),그리고 몇몇 재독 유학생들이 동베를린을 구경하고 돌아온 것을 두고 북한의 배후 조종에 따른 어마어마한 "간첩단" 사건으로 확대 조작한 것이다. 중앙정보부 발표문에 따르면 천상병은 강빈구와 만난 자리에서 '동인이 간첩활동을 하고 있어 수사대상 인물임을 기화로 금품을 갈취할 목적하에 동인에 대하여 중앙정보부에서 내사중이라고 말하여 상피의자로 하여금 공포감을 갖게' 한 뒤에 수십여 차례에 걸쳐서 '1백원 내지 6천5백원씩 도합 5만여원을 갈취착복'하면서 수사기관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울대 상대 동문이자 친구인 강빈구(姜濱口)는 독일 유학중 동독을 방문했었다는 얘기를 천상병에게 자랑스럽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천상병은 예의 다른 문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강빈구로부터도 막걸리 값으로 5백원,1천원씩 받아 썼던 것이다. 그것이 순진무구하고 천진난만한 시인 천상병이 '국사범'으로 조작되는 사건의 실체였다. 사건의 진상을 파악한 문인들은 어처구니없어 실소를 터뜨렸다. 어쨌든 천상병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3개월,그리고 교도소에서 3개월 동안 갖은 고문과 치욕스러운 취조를 받고 난 뒤 선고 유예로 풀려났다. "이젠 몇 년이었는가/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당한 그날은….//이젠 몇 년이었는가/무서운 집 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네 사과 뼈는 알고 있다. /진실과 고통/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천상병은 중앙정보부에서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전기고문을 세 번씩이나 당했다. 그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정신병원에도 갔다오고 아이도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는 이 사실을 스무 해나 지난 뒤에 털어놓았다. '그날은―새'라는 시는 '그날'의 고통과 치욕의 경험을 간결하고 단호한 시행 속에 압축해놓고 있다. "고문은 받았지만 진실과 고통은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나타내 주었기 때문에 나는 진실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었던 것이다. 남들은 내가 술로 인해 몸이 망가졌다고 말하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의 추측일 뿐이다." 그를 한번이라도 만나본 사람은 그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금세 알 수 있다. 불편한 손놀림과 발걸음,잿빛의 얼굴,입가에 허옇게 달라붙은 침의 흔적,"괜찮다,괜찮다,괜찮다…"라고 말하는 그만의 어눌하면서도 동어반복적인 화법 등.그의 이런 '특징'은 과도한 음주의 결과가 아니었던 것이다. /시인·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