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바야흐로 월드컵 열풍에 휘말려들었다.


지구촌 60억의 시선은 31일 개막식이 열리는 한국으로 일제히 쏠리고 있다.


한 달간 펼쳐질 축구열전은 기라성같은 스타들을 줄줄이 배출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신출귀몰의 기량으로 전세계를 뜨겁게 달굴 것이다.


거스 히딩크. 나이 56세. 네덜란드 출신. 현직은 월드컵 한국대표팀 감독.


그는 이번 월드컵이 낳는 최대의 스타로 떠오를 가능성이 높다.


염원인 16강에오를 경우 한국의 스포츠 영웅으로 부상할 것이 분명하다.


최근 몇 차례 평가전은 잘만 하면 16강 이상도 넘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성급한 전망까지 나오게 한다.


한국팀의 실력이 몰라보게 달라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단순한 호들갑은 아닌 듯 싶다.


히딩크 감독이 스타로 대접받은 것은 극히 최근이다.


올해 초 북중미 골드컵 때만 해도 성적이 부진해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애인 문제까지 불거져 코너에 몰렸다.


그는 "엘리자베스 문제는 사생활이다.


나는 축구를 위해 한국에 왔다"고 맞받았지만 외국인으로서 느끼는 감정은 결코 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히딩크의 저력은 잉글랜드, 프랑스와의 평가전을 통해 마침내 솟구쳤다.


본고장 축구와 비기고 지난번 월드컵 우승국과 대등한 경기를 펼치자 그를 보는 눈들이 크게 달라졌다.


한때 들먹거리던 '외국감독 무용론'은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대신 기대와 열광의 시선이 그를 향해 쏟아지고 있다.


한국팀의 축구는, 아니 히딩크의 축구는 강인한 체력과 빈틈없는 조직력을 특징으로 한다.


과거에는 전반에 잘 뛰다가도 후반에 힘이 달려 역전패하곤 했으나 지금은 상황이 싹 달라졌다. 히


딩크는 "90분간 쉴새없이 뛰며 경기를 지배하라"고 주문한다.


한국축구가 재미있어진 것은 이런 박진감과 정교함 때문이다.


조직력과 두뇌경기도 돋보인다.


자로 잰 듯한 세트 플레이는 구미 선수들이나 하는 것인 줄 알았으나 평가전에서는 한국팀도 얼마든지 구사할 수 있음을 확인해줬다.


외국선수의 덩치와 신장에 밀려 좀처럼 따내지 못했던 헤딩골도 최근에는 심심치 않게 터뜨리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한국축구 대표팀의 실력향상이 히딩크 감독의 리더십에 있다고 분석한다.


리더십의 요체는 △강한 추진력 △비전 제시 △철저한 사전준비 △자신감 고취 △자율과 책임 △공격적 경영 △기초경쟁력 중시에 있다.


그는 대표팀 성적이 바닥을 헤매고 주변의 비난이 쏟아질 때 "훈련은 프로그램대로 충실히 진행되고 있다"며 뚝심대로 밀고나갔다.


한국팀이 16강에 합류한다면 히딩크 감독은 '국민적 영웅' 반열에 오를 게 확실하다.


그리고 내친 김에 북한이 이뤄낸 8강 신화의 재창출을 사람들은 기대할 것이다. 히딩크 팬클럽이 생기고, 스토커들이 그를 강제귀화시켜 대통령 후보로 추대할 것이라는 농담이 이미 인터넷 메일을 통해 돌고 있을 정도다.


히딩크 신드롬이 낳는 효과는 단순히 축구에 그치지 않는다.


히딩크는 한국역사상 서양인으로는 최고의 대접을 받을 수 있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한때 '영웅'이 된 것과는 궤를 달리한다.


그 사회심리적 효과가 매우 길게 지속되리라는 얘기다.


한국인은 유달리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하다.


단일민족이라는 자부심은 곧 잘 폐쇄성으로 이어져 외국인에 대한 배척이 두드러졌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이 그랬고, 외국자본에 대한 거부감이 그랬다.


이는 열강의 침탈과 한일합방 등에 따른 것이긴 했지만 부정적 효과 또한 만만치 않았다.


특히 1990년에 화두처럼 나온 한민족공동체 구상은 남과 북에서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절대선인 민족주의의 결정판이었다.


대통령도 '민족이 가장 우선한다'고 강조했고, 모든 국민이 이에 공감했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지나친 민족주의는 내적 역량강화 및 자부심 고취 등 긍정적 효과에도 불구하고 폐쇄성과 자기우월감 등 '우물 안 개구리' 역효과도 수반하기 쉽다.


'신토불이'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와 같은 유행어는 자신을 객관화시키는 데 방해요소가 되기도 한다.


언론보도에서조차 '우리'라는 단어가 남발되고 있음은 이를 잘 반영한다.


지역감정도 이같은 폐쇄성의 한 현상일 뿐이다.


히딩크 신드롬은 한국을 닫힌 사회에서 열린 사회로 이끄는 데 일정한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좀처럼 외국인에게 말을 걸려 하지 않고, 외국인이 말을 붙여와도 어색하게만 대하는 자세가 익숙한 가까움으로 바뀌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물론 경기장에서는 붉은악마 중심의 '대ㆍ한ㆍ민ㆍ국' 응원구호가 불같이 뜨겁겠지만 이런 변화의 물결이 우리 자신도 모르게 일고 있는 것이다.


벽안의 감독 히딩크.


그는 공교롭게도 349년 전 제주도에 표류했다가 13년간 조선에 머물고 돌아간 하멜과 같은 나라 출신이다.


하멜이 「하멜 표류기」로 조선의 존재를 세계에 알렸다면 히딩크는 축구를 통해 한국사회의 개방적 변주에 한몫을 할 것으로 보인다.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id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