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한중인 노벨상 수상작가 귄터 그라스(75)의 대표작「넙치」(민음사刊)가 번역 출간됐다. 1977년 발표된 이 작품은 식량과 여성 문제를 중심으로 인류 문화사를 조망하면서 남성중심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고 진정한 페미니즘을 모색해 본 독창성 강한 소설이다. 이 세상에 처음부터 존재한, 즉 4천여년을 살아온 '내'가 임신한 아내 '일제빌'에게 9개월간 들려주는 이야기가 소설의 기본틀이다. 선사시대부터 철기, 중세, 바로크, 절대 왕정기, 19-20세기 혁명기, 제3제국, 현대에 이르기까지 내가 만났던 열 한명의 여자 요리사에 대한 이야기가 시대 순으로 전개된다. 또 나와 마찬가지로 약 4천년간 존재해 온 '말하는 넙치', 그리고 그가 역사적으로 남성편만 들어왔다는 죄목으로 여성 배심 법정에서 재판받는 과정도 이야기의 다른 한축이 된다. 장구한 역사를 통해 넙치는 여자에게서 남자로 협력 대상을 바꿨다가 남성 중심의 역사가 초래한 파멸을 지적하며 다시 여성의 조언자 역할로 나선다. 그것 또한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없고 '제3의 길'이 필요하다는 것이 저자가 암시하는 바이다. 작품 서두의 헌사 '헬레네 그라스에게'의 헬레네는 저자의 딸인데, 그라스는 헬레네가 잉태된 1973년에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살아가야하는 딸을 위해 들려주는 이야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동화같은 서술 방식을 활용한 것도 이 소설의 특징중 하나. 실제로 그림 형제의 동화 가 소설의 모티프가 됐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화가이기도 한 그라스는 책 표지를 포함, 넙치와 관련된 삽화를 직접 그렸다. 요리를 근간으로 한 소설 내용도 작가 자신이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점과 상통한다. 김재혁 옮김. 전2권. 각권 500쪽 내외. 각권 1만원. (서울=연합뉴스) 이성섭 기자 leess@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