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소로스의 퀀텀펀드는 양자역학에서 이름을 빌려왔다. 퀀텀(Quantum)은 양자(量子)란 뜻.소로스는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에서 퀀텀을 측정하기 힘든 것이란 의미로 차용했다. 실제로 소로스의 축재는 타고난 직관력에 의해 가능했다. 소로스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수학을 싫어했으며 런던경제대학(LSE)은 삼수 끝에 간신히 붙었고 증권분석가 자격증 시험은 수차례 낙방한 뒤 아예 포기해버렸다. 젊은 소로스는 "숫자를 보면 느낌이 온다"고 자신만만해 했다. 뉴욕타임스 기자 출신의 마이클 카우프만이 쓴 '소로스'(월간베스트인코리아출판부,1만5천5백원)는 소로스를 단순한 투기꾼으로 보지 않고 철학을 가진 금융자본가로 파악한 일종의 전기다. 소로스 인터뷰와 각종 자료를 토대로 쓰여진 이 책은 소로스를 '자본주의 악마'로 보는 시각에 정면 반대한다. 소로스는 칼 포퍼를 스승으로 열린 사회를 추구했던 의식 있는 '금융인'이었다는 것이다. 소로스는 자유주의 수호자로서 폴란드 자유노조,모스크바 반체제집단에 자금을 댔다. 보스니아 분쟁 땐 사라예보 여인들이 물을 길어가다 저격되는 것이 안타까워 수도 복구를 위해 5천만달러를 내놓기도 했다. 이처럼 '정승같이' 돈을 쓴 덕에 노벨평화상 후보에까지 올랐다는 주장이다. 1930년 유태계 헝가리인으로 태어난 소로스는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나치의 박해로 이름을 바꾸고 기독교인 행세를 하며 학살을 피했다. 종전 후 런던에 유학한 소로스는 접시닦이,마네킹공장 직원,철도역 짐꾼 등을 하며 학비를 조달했다. 당시 다리가 부러져 산업재해연금을 받았는데 한 학기동안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고 소로스는 회상한다. 영어도 제대로 못하던 헝가리 '촌놈'은 간신히 학교를 졸업한 뒤 증권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때부터 소로스의 비상한 재주가 불을 뿜게 되었다. 1956년 뉴욕의 월가로 진출한 소로스는 5년내 50만달러를 벌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해외 증시를 맡은 소로스는 새벽 4시에 일어나 런던증시 개장시간에 거래 주문을 넣고 다시 잠을 잤다. 밤잠을 설쳐가며 일한 덕에 그는 5개년 계획을 조기에 달성할 수 있었다. 소로스의 돈 굴리기는 '선투자 후조사' 원칙을 지킨다. 10분전에 결정한 것도 뒤엎기 때문에 소로스(Soros)는 헝가리어로 '변덕'을 뜻할 것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많았다. 소로스는 어린 아들과 게임을 할 때도 봐주는 법이 없었다. 이처럼 지독하게 한 덕분에 1969년 10만달러였던 자산이 1997년 3억5천3백만달러로 불어났다. 이 책은 세계 최고 갑부 중의 하나인 소로스의 인생을 이야기하며 박애주의적 자선사업가로서의 그의 면모를 부각시키고 있다. 독자에 따라서는 편향적인 서술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윤승아 기자 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