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마(靑馬) 유치환(柳致環,1908-1967년)을 생각하면 먼저 통영과 우체국을 떠올리게 된다.

청마는 통영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아버지가 유약국을 경영하고 있었고, 청마는 통영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훗날 아내가 되는 권재순을 만나 누이, 오빠로 지내다가 결혼을 하기도 했다.

청마는 '우편국에서'라는 시를 남기고 있는데, 아마도 통영에 있는 한 작은 우체국일 것이다.


'진정 마음 외로운 날은/여기나 와서 기다리자/너 아닌 숱한 얼굴들이 드나는 유리문 밖으로/연보랏빛 갯바람이 할 일 없이 지나가고/노상 파아란 하늘만이 열려 있는데'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은 그 기다림 때문에 행복하다.

우체국의 유리문이 여닫힐 때마다 파란 하늘과 함께 갯비린내가 밀려 왔다.

아마도 시인은 거기에 와서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를 부치고 한참 동안 앉아 있다 돌아갔는지도 모른다.

시인은 살아 있는 동안에 많은 여인들을 연모했고, 그 쉬지 않는 연모에서 시를 길어냈다.

청마는 어느 글에선가 "나의 생애에 있어서 이 애정의 대상이 그 후 몇 번 바뀌었습니다. 이같은 절도 없는 애정의 방황은 나의 커다란 허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라고 자성의 빛을 비치기도 했지만, 여인들이란 시인에게 '항상 얻지 못할 영혼의 어떤 갈구의 응답인 존재'였던 것이다.

청마의 가장 널리 알려진 연모의 대상은 시조시인 이영도이다.

청마는 1946년께 이윤수 시인 등과 함께 '竹筍(죽순)' 동인을 했다.

대구 서문로에서 名金堂(명금당)이라는 시계점을 내고 있던 이윤수는 1946년 5월 1일자로 해방 이후 최초의 시동인지인 '죽순' 창간호가 나오자 점포 앞에 '죽순시인구락부'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그 해 11월이 다 저물 무렵 명금당에 나타난 청마는 동인들과 사나흘 같이 지내다 집으로 돌아갔다.

청마가 여류 시조시인 이영도를 처음 만난 것도 바로 '죽순' 동인을 통해서이다.

당시 통영여중의 교사로 있던 이영도는 결핵으로 남편을 잃고 혼자였다.

청마는 이영도를 향해 쉬지 않고 편지를 보내고, 숱한 연모의 시를 썼다.

청마의 이영도에 대한 사랑은 매우 고통스러운 사랑이다.

'쉬이 잊으리라/그러나 쉬이 잊히지 않으리라'

그들은 같이 있을 수 없었다.

그의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연정의 조각'은 '가슴을 저미는 쓰라림'으로 그를 찔렀다.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어룽'은 마침내 다음과 같은 명편의 시를 낳기도 했다.

'오늘도 나는/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 뵈는/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행길을 향한 문으로 숫한 사람들이/제각기 한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봇지를 받고/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한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사랑하는 것은/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느니/…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하지만 사람들은 청마 유치환을 '깃발의 시인'으로 기억한다.

남성적 준열한 삶의 의지를 실어나르는 한문 투성이의 그의 시들은 한과 애상, 그리고 여성적 비극의 정조로 물들여져 있는 한국 현대시의 맥락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다.

청마는 "나는 시인이 아닙니다. 만약 나를 시인으로 친다면 그것은 분류학자의 독단과 취미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어찌 사슴이 초식 동물이 되려고 애써 풀잎을 씹고 있겠습니까?"라고 두 번째 시집 '생명의 서'의 '서문'에서 썼다.

그의 목소리는 높고 준열하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저 푸른 海原(해원)을 향하야 흔드는/永遠(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純情(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오로지 맑고 곧은 理念(이념)의 標(표)ㅅ대 끝에 /哀愁(애수)는 白鷺(백로)처럼 날개를 펴다./아아 누구던가/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국정교과서에 실림으로써 유명해진 '旗빨'이다.

그 '기빨'은 무엇일까?

그가 지향했던 '정신적 높이'와 상응하는 위치에서 펄럭이는 그것은 아직 변질하지 않는 생명의 원형이었을까?

해방 이전까지만 해도 문단적 교류가 전무한 채 변방에서 외롭게 혼자 시를 써가던 청마는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라는 불멸의 에피그람을 남겼다.

1908년 경남 통영의 태평동에서 한의였던 유준수의 8남매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장남은 극작가인 유치진이다.

그의 부친은 본래 거제군에서 살았으나 결혼한 뒤에 처가가 있던 통영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그는 외가에서 태어나 11세 때까지 서당을 다니며 한문을 배웠다.

어린 시절의 그는 말이 통 없는 소년이었다.

학교의 종이 울리더라도 뛰어가는 법이 없이 조용히 걸어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실로 들어갔다.

그가 통영보통학교 4학년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야마(豊山) 중학교에 입학한 것은 1922년이다.

그의 형 유치진은 3학년에 재학중이었다.

그의 내성적 성격은 중학교 시절 더욱 심화되었다.

일본인 친구들을 사귀는 대신에 그는 혼자 책을 읽고 무언가를 쓰는 일에 열중했다.

도일한 이듬해 관동대지진을 맞이했고, 그 때 잔학한 일인들에 의해 무고한 한국인들이 무참하게 학살되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주일학교에서 만난 소녀에게 매일같이 신문을 보냈다.

그 소녀가 바로 권재순이다.


< 시인.문학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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