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더이상 남루한 일상의 초입이 아니다. 그것은 고도의 소비수준을 지탱해 줄 안온한 생활을 기약한다. 사랑이 없다면 누추한 골방에서 애인과의 연애로 충족시키면 된다. 이만교 원작소설을 옮긴 멜로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유하 감독)는 결혼제도의 신성성을 모독한 이 시대 연인들의 초상을 담아냈다. 가수이자 배우 엄정화(31)가 연애와 결혼을 분리시켜 영위하는 여성상을 체현했다. 1993년 '바람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이후 두번째로 주연한 엄정화는 여기서 가부장적인 '일부다처제'를 거부하고 '일처다부제'의 깃발을 당당히 올린다.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는 공감이 가지 않는 부분이 많았어요. 처음 만난 남녀가 당일 하룻밤을 같이 보낸다든가 조건만 보고 결혼하는 대목들이 그것이죠. 그러나 작품에 몰입하면서 여자들이 느끼는 허전함과 외로움이 차츰 느껴지더군요" 엄정화가 맡은 연희는 소비문화에 길들여진 신세대여성이다. 높은 소비수준이 필요한 자기문화를 포기할 수 없지만 연애감정도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 그녀는 연애와 결혼을 분리시킴으로써 두 가지를 모두 취득한다. 돈 잘 버는 의사와 결혼하고 가난한 시간강사 준영(감우성)과는 지속적인 연애관계를 갖는 것이다. 결혼은 조건이지만 연애는 그야말로 마음이란 믿음에서다. 연희의 섹스관도 자연스럽게 이중적이다. 남편과는 의무사항이지만 준영과는 권리실현이다. 연희가 준영과의 첫 만남에서 섹스하는 장면은 섹스가 그녀에게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그저 '소통의 시작'일 뿐임을 시사한다. 성관계를 전제로 한 고전적인 결혼관은 이미 낡았다. 준영은 그녀의 결혼상대 리스트에서 자신이 제외됐기 때문에 그녀가 (결혼에 필요한) 절차를 무시하고 자신과 섹스했다고 믿는다. 냉소적인 지식인 준영은 결혼의 책무를 감당하기가 싫다. "연희는 준영의 마음을 떠보지만 거절당하지요. 그녀가 사랑없는 결혼을 선택하는데는 준영의 행동에도 영향을 받습니다" 연희는 결혼후 두 곳에 살림을 차린다. 남편과는 호사스런 아파트에서, 준영과는 작은 옥탑방에서. 그녀는 "(남편에게) 들키지 않을 자신 있다"고 되뇌며 이중생활을 지속한다.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그저 '(남들보다) 바쁘게 사는 느낌'을 갖는다. 이로써 연희는 "평생 데이트하면서 달콤한 말을 듣고 싶다"던 소망도 실현한다. 연희에게 '이룩된' 사랑(결혼)은 유복한 일상을 보장해 주며 '이룩되지 않은' 사랑(연애)은 불꽃같은 정념을 소비시켜 준다. 신성한 결혼을 수호해 온 헤라여신도 현대소비사회에서는 무기력하다. 그리스신화에서와 달리 이들은 헤라여신으로부터 아무런 징벌을 받지 않는다. 연희는 '물신화된 도시여성'을 대변한다. 자신을 끊임없이 다르게 연출하는 문화에 익숙해진 그녀는 결혼을 '포장된' 자아를 실현하는 방편으로 생각하며 연애는 포장이전의 본심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간주한다. 영화는 연희의 결혼생활은 철저히 무시하고 연애에만 집중한다. 이로써 사랑없는 결혼은 껍데기일 뿐임을 항변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 출연하기 전에는 조건이 맞는다면 결혼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지요. 하지만 이제는 이런 선택을 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녀의 완벽한 이중생활에서 까닭없는 슬픔이 전해 온다면 아직도 결혼에 대한 환상이 남아 있다는 증거일까. 관객 스스로 시험해 보길 권한다. 18세 이상. 26일 개봉.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