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박물관이 최근 해제집을 발간한 「청해이씨(靑海李氏) 기증고문서」는 조선 개국공신인 여진족 출신 이지란(李之蘭. 1331-1402. 원래 이름은 퉁두란)을 시조로 하는 이 집안이 소장해온 일괄 고문서류다. 모두 102점인데 그중 '이중로(李重老) 가장(家狀)'이라는 제목이 붙은 한 점이 있다.'가장'이란 말 그대로 특정 집안 조상의 행적을 기록한 문서를 말한다. 이중로(1577-1624)는 이지란의 후손으로 10대에 임진왜란을 만났고 인조반정 직후 이괄의 난 때에는 관군으로 반란군을 막다가 희생된 인물이다. 이러한 그의 행적을 드높이고자 그 아들 이문웅이 쓴 글이 '이중로 가장'이다. 이를 통해 이중로의 삶을 훑어가다 보면 아주 흥미로운 구절을 곳곳에서 만나게된다. 예컨대 이중로가 6살 되던 해의 일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소개돼 있다. 한 나그네가 이중로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됐는데 그만 이불에다가 오줌을 싸고는 주인(이중로의 아버지)에게 인사도 없이 줄행랑을 쳐버렸다. 집안 사람들이 무례하다 해서 그 나그네를 욕하는데 6살짜리 이중로는 이렇게 말했다 한다. "이것은 우연일 뿐이다. 손님이 주인을 부르지 않고 그릇에 담긴 물을 마시려다쏟아져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이 '가장'에는 또 이중로가 16살에 임진왜란을 만나 온집안이 산골로 피난갔을때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나온다. "무뢰한 무리가 왜적(倭敵)의 옷을 걸치고 사람들의 재물을 빼앗거나 함부로 사람을 죽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모두가 놀라고 두려워하며 흩어지고자 했다" 이 다음 내용이 어떨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우리의 주인공 이중로는 용감무쌍하게 혼자서 도적떼를 물리쳤다는 내용일 것이다. 실제 그렇게 돼 있다. 한데 우리는 위 기록을 통해 임진왜란과 관련된 아주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간파한다. 헐벗고 굶주려 도적이 된 조선사람들이 왜인을 가장, 조선인들을 상대로 약탈행위를 저지르곤 했다는 것이다. 이 경우 틀림없이 도적떼는 일반 백성이나 노예 출신일 것이며 약탈 대상자는양반을 포함한 부유층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도적떼는 왜 유독 왜적 행세를 했을까? 아마도 왜인이 그만큼 당시 조선사람들에게 두려운 존재로 비쳤기 때문에 그 위세를 빌려 약탈을 일삼고 다녔을 것이다. 전쟁이나 공황과 같은 위기에서 굶주린 사회계층의 약탈행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이중로 가장'을 계속 읽어가다 보면, 그를 죽음으로 몰고간 이괄의 난에 얽힌이야기가 집중적으로 나온다. 이괄은 인조반정에 참여했음에도 충분한 보상이 없다고 해서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이 난이 얼마나 세력이 컸던지 인조는 한양을 버리고 피난을 가야 할 정도였다.이중로는 이괄의 반란군을 막다가 1624년 2월 7일 평산 능촌 전투에서 전사했다. '가장'은 이중로가 "군사가 적군에 비해 너무나 적고 화살이 힘이 다하여 전세가 기울어짐을 알고는 총철(銃鐵)을 휘두르면서 적병 일곱 사람을 모두 죽이고 물에 뛰어들어 죽으니 그 때 나이 48세였다"고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기록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실제로는 반란군에 살해당했는데 자결했다고 조작했을 가능성도 있다. 어떻든 이괄의 군대는 인조를 한양에서 몰아내고 반란군 진압장군의 한 명인 이중로를 전사하게 할 만큼 세력이 강력했다. 그 원천은 어디에 있을까? 이에 대해 '가장'에 흥미로운 구절이 있다. "이에 적병(이괄의 반란군)은 항복한 왜병을 선봉으로 세우고 두 편으로 나뉘어좌우방어사(반란진압군)의 군진을 곧바로 침범했다" 반란군 선봉에 항복한 왜군이 선 것이다. 항복한 왜군이란 누구인가? 임진왜란때 생포해 본국에 보내지 않은 왜군 잔병을 말한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는가? 실제 「인조실록」에 남아 있는 이괄의 난기록을 보면 이괄의 반란군에 적지않은 왜병 출신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왜병 출신들의 전투력이 조선 조정에는 얼마나 두렵게 보였는지 어떤 기록을 보면 조선군으로는 막을 수 없으니 동래(부산)의 왜관(倭館)에 체류하고 있는 일본인들을 동원해 이들을 토벌하자는 논의가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이괄의 난에서 임란 당시 왜병 포로들이 적지 않은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어찌된 셈인지 국내 학계에는 이를 전문적으로 다룬 연구논문 한 편이 없다고조선사 전공자인 한명기 경기대 교수는 지적한다.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포로 및 그 송환에 관한 논문은 쏟아져나와 있는 데 반해 조선의 포로가 된 일본인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왜 이리도 우리 학계는 철저하게 침묵을 지키는 것일까.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taeshi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