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비로 내려/땅을 적시고 흙 속으로 들어가/어두운 돌 속까지 스며들어/당신께 갈 수 있다면/당신이 가리킨 산목련 한 송이라도 피워줄 텐데//(중략)//상처 없이 살아가기에는/이 세상 모든 것에게 다 미안하다고/그렇게 말해주며 같이 걸어갈 수 있을 텐데'('동행' 부분) 시인 배문성씨(44)가 13년만에 새 시집 '노을의 집'(민음사)을 냈다. 1982년 등단한 뒤 89년 첫 시집 '당신들 속으로'를 내고 두번째 묶은 시집이니 20년 시력의 중견으로서는 어지간히 과작이다. 시인은 그동안 지나온 길 위의 추억들과 그늘진 숲속 같은 세상에 대해 자꾸 미안해한다. '내가 살아온 세월들에게 미안하다/내가 보았던 풍경과 사연들에게 미안하다/미안하다 미안하다/나의 것들이었던 것들이여/한번만이라도 나의 화해를 받아주시길…'('추억에게') 하며 자책한다. 무엇이 시인을 이토록 괴롭게 하는가. '네 앞에서/저렇게 물들고 있는 노을 앞에서/들어가지도 못하고/돌아서지도 못하고/남아서 지키고 있다는 것이/미치는 일이다'('노을 앞에서' 부분) '나는 누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란 생각에 몰두해 있었다. /내가 너를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나는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노을의 집' 부분) 고단한 시절의 등성이를 힘겹게 넘는 40대.잔등으로 배어나는 땀처럼 그 속에 스민 삶의 옹이들이 그를 아프게 한다. 그는 마흔 살 어느날 거울에 비친 제 모습에서 영락없는 아버지를 발견하고 흠칫 놀란다. 그토록 닮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의 모습.'아마 나의 아들도 나를 닮지 않으려고 할 것'이라고 위무하는 시인을 '아이가 40이 될 무렵이면/아이도 나를 닮았다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더욱 무겁게 짓누른다. 지는 노을 속에서 흘러나오는 전화벨 소리.사람은 보이지 않고 '내가 버린 모든 사람이 그리워'지는 저녁에 그는 희망을 생각한다. 그것은 '앞으로 다가올 깨끗한 삶을 기다리며/지금 마음껏 추악해져 가라는 스스로에 대한 허락'일까. 그는 '아예 그 싹도 보이지 않게 와장창 절망해 버릴 것/그것이 이 땅에서 희망을 갖는 유일한 길'이라고 역설한다. 문인이자 기자(문화일보 문화부)로 살아온 시인에게 또다른 아픔은 선배를 잃은 기억.몇년째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있는 그는 지난 91년 6월초 시인 고정희를 앗아간 지리산 조난사고 때 산행 동반자였다. 그래서 더욱 '사는 것이 미안함을 쌓아가는 일이 되었'던 시인.'부디 나를 휘둘러/저 절벽 아래로 내동댕이쳐 주시옵소서'('타자를 위한 기도')라고 절규하는 대목에서 우리는 소멸과 추락의 이미지를 재생과 상승의 이미지로 바꿔 읽게 된다. 같은 시에서 시인이 '사람에게 미안한 것은 오직 산에서만 용서받는다'고 고해하는 동안 그 곁에서 친구인 이문재 시인은 '이제 그만 됐다. 그만 미안해해라'라고 발문을 적는다. 고두현 기자 kdh@hankyung.com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