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말,서울 명동의 한 술집에서 시인 몇이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 이미 술기운이 올라서 다들 붉어진 얼굴이다. 그들 사이에는 시며 잡지,원고료,문단 얘기들이 오간다. 다만 유난히 키가 큰 한 사나이는 아까부터 입을 꾹 다문 채 말이 없다. 좌중의 화제가 사회와 정치 쪽으로 옮아가자 입을 다물고 있던 사나이도 말문을 연다. 엔간히 취기가 올라 있던 그는 자유당과 이승만을 향해 직설적인 비판과 함께 욕을 토해낸다. 한 시인이 제지하려고 들자 그가 대뜸 항의한다. "아니,자유 국가에서 욕도 내 마음대로 못 한단 말이오?" "글쎄,김형 말이 도에 지나치니까 하는 말이지" "도에 지나쳐? 그럼 이 썩어빠지고 독재나 일삼는 정부며,늙은 독재자를 빼놓고 불쌍하고 힘없는 문인들 험담이나 해서 쓰겠어? 당신 시가 예술지상주의 냄새가 나는 건 그 지나친 조심조심 때문이오!" 이에 상대방이 발끈해 말다툼으로 번지고 결국 술상까지 엎어져 술자리는 난장판으로 끝난다. 이 키 큰 사나이가 바로 시인 김수영(金洙暎·1926∼1968년)이다. '푸른 하늘을 제압(制壓)하는/노고지리가 자유(自由)로왔다고/부러워하던/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修正)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비상(飛翔)하여 본 일이 있는/사람이면 알지/노고지리가/무엇을 보고/노래하는가를/어째서 자유에는/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혁명(革命)은/왜 고독한 것인가를//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이라고 노래한 김수영. 그는 현실의 전위에 선 시인의 불온성을 온몸으로 밀고 나가며,도시 소시민의 내면과 자의식을 까발려 내보이며,그때까지 한국 시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여성적 운율과 재래의 토속성을 벗어던지고 세련된 도시 모더니즘의 시세계로 나아갔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온갖 금기와 허위의식을 깨뜨리기 위해 좌충우돌하며 그가 생전에 남긴 1백80여편의 도저한 요설의 시들은 곧 쉬지 않는 싸움의 도구이고,싸움의 현장이다. 그는 1921년 11월27일 서울 종로 6가에서 김태욱(金泰旭)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다. 김수영네는 경기도 파주·문산·김포와 강원도 철원·홍천 등지에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해마다 4백여석을 거둬들이는 지주 집안이었으나,일제의 침탈 뒤 급변하는 사회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몰락했다. 어의동공립보통학교(지금의 효제초등학교)를 전학년 우등으로 마친 김수영은 당대의 수재들이 진학하던 경기도립상업학교에 응시했다가 떨어진다. 당연히 합격할 것으로 알았던 집안은 낙방 소식에 울음바다가 된다. 2차로 응시한 선린상업 주간부에도 떨어져 결국 선린상업 전수과 야간부에 진학한다. 상급학교 입시에 거푸 실패한 것은 잔병치레가 잦던 그가 보통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폐렴과 늑막염으로 앓아 누워 1년쯤 학업을 쉰 탓이다. 1941년 김수영은 선린상업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간 뒤 도쿄성북(東京成北)고등예비학교와 도쿄상대(東京商大) 전문부에 적을 두고 공부한다. 유학에서 돌아온 뒤 태평양전쟁의 막바지에 만주 지린성(吉林省)으로 이주한 가족을 따라가 거기서 한동안 연극에 빠져든다. 그는 해방과 더불어 귀국한 뒤 친구와 함께 일고여덟 달 동안 영어 학원을 경영하기도 한다. 이 무렵 연극에서 시 창작으로 진로를 굳힌 그는 1945년 '예술부락'에 '묘정(廟廷)의 노래'를 내놓으며 문단에 나온다. 그의 등단작은 평론가 김현의 말처럼 "조지훈류의 회고 취미가 압도적"인 작품이다. 그가 연희전문 영문과 4학년에 편입학했다가 이내 그만둔 것은 1946년의 일이다. 선배 시인들의 복고적이고 퇴영적인 언어 관습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자신의 작품에 불만이 많던 그는 두번째 작품인 '공자(孔子)의 생활난(生活難)'에 이르러 범속한 일상 용어들을 시어로 바꿔놓는다. 김수영의 시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은 사물과 현실을 '바로보려는 정신'이다. 이 비타협적인 '바로보려는 정신'이야말로 반골의 전형성을 드러내는 정신인 것이다. 1950년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진다. 서울의대 부설 간호학교에서 영어 강사 노릇을 하고 있던 김수영은 인민군이 퇴각할 때 의용군으로 징집되어 이북으로 끌려간다. 1개월 동안 훈련을 받은 뒤 북원훈련소에 배치된 그는 유엔군이 평양 일대를 장악하면서 자유인이 되어 남하한다. 얼마 뒤 서울 충무로에서 경찰에 체포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보내진다.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고 스스로 전하듯이,그는 포로수용소 야전 병원 외과 원장의 통역으로 있다가 풀려난다. 그는 이후 미8군 수송관의 통역,선린상고 영어 교사,평화신문사 문화부 차장 등을 거친다. 서울 마포 구수동으로 이사한 1955년 무렵부터 그는 양계(養鷄)와 번역을 하며 힘겹게 가족을 부양한다. < 시인·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