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그림에는 미인도랄 게 없다. 구수한 흙냄새가 코끝을 스쳐갈 때 나는 향기로운 여인의 탄생을 보게 된다" 1985년 후두암으로 작고한 최영림 화백은 88년 현대화랑에서 발간한 '최영림 데생집'에서 그의 작품의 핵심인 여인상을 이처럼 설명했다. 관능미 넘쳐 보이지만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기 힘든 이상향의 여인이라고 할까. 그의 작품세계를 되돌아보는 '최영림 유작전'이 오는 15일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전관과 특별전시관에서 개막된다. 1990년 호암갤러리에서의 전시 이후 12년만에 열리는 대규모 기획전이다. 50년대의 '흑색시대',60년대의 '황색시대',그리고 절정기였던 70년대 대표작 1백10여점이 출품된다. 그의 작업 열정이 배어 있는 아틀리에를 비롯 표주박 찻잔 벼루 등 화구와 유품으로 연출하는 특별전도 마련된다. 최 화백의 트레이드 마크는 단연 나부(裸婦)다. 풍만한 가슴과 기이하게 큰 얼굴,벌거벗은 여체들이 황토색의 전통적 질감으로 화면을 가득 메운다. 다작(多作)이었던 그는 캔버스 도마 신문지 모시천 등 다양한 재료 위에 모래와 유화물감으로 자신의 영감을 펼쳤다. 그는 왜 그토록 나부에 집착한 것일까. 그의 작품을 이해하려면 그의 삶의 궤적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16년 평양에서 태어난 최영림은 한국전쟁 때 처자를 북에 두고 단신 월남했다. 이 사건은 평생 그의 삶을 지배했고 작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국전쟁 때 마산에 정착한 그는 거칠고 굵은 검은 선과 색조가 주류를 이루는 작품들을 그렸다. '흑색시대'로 불리는 이 시기의 어둡고 탁한 화면은 전쟁의 비극과 이산의 고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절망의 늪에서 헤매던 그에게 재혼(1959년)은 색조와 형식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그는 1960년대 초부터 '심청전''장화홍련전'과 같은 소설을 소재로 에로틱하고 풍만한 여체와 동물들이 어우러진 모습을 독특한 질감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국내 최초로 모래를 캔버스에 도입하는가 하면 고가(古家)의 황토 흙벽을 곱게 빻아 밑그림으로 깔기도 했다. 재료의 실험은 당시로선 파격적이었다. 실험과 모색기를 거쳐 70년대부터는 '최영림식 나부'가 등장한다. 말이 나부지 그것은 현실세계에서 만날 수 있는 여성이 아니다. 왜곡되고 과장된 여체들은 시공을 초월한 설화의 세계로 분단시대 실향민으로서의 망향정신이 담겨 있다. 여체에서도 두상과 유방은 필요 이상으로 강조돼 있다. 입체감이나 원근법을 무시한 채 선묘만으로 여체를 풀어냈다. 최영림은 1940년대 평양에서 박수근 장리석 황유엽 등과 '주호회'를 결성해 수차례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평론가 윤범모씨는 "박수근은 평범한 시골 아낙네를,최영림은 관능적인 나체여인을 그렸다는 차이가 있다"며 "박수근이 시대상황을 담보한 화풍을 보였다면 최영림은 시공간을 초월한 세계를 지향했다"고 말한다. 4월 7일까지.(02)3217-0233 이성구 기자 s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