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보 기자로 재직중인 시인 배문성(44)씨가 새 시집「노을의 집」(민음사)을 냈다. 82년 등단한 뒤 89년 첫 시집「당신들 속으로」이후 13년만에 내놓는 시집이다. 새 시집을 읽다보면 신문기사에는 드러나지 않는 기자 개인의 내면과 삶의 궤적의 일단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여기에는 결코 개인사로 국한될 수 없는 사회적 사건들도 포함된다. 시인에게 이 땅 이 세상에서 희망을 갖는 것은 "지금 마음껏 추악해져 가라는 스스로에 대한 허락"()일 뿐이다. 시대와 세상에 대한 불신일까? 시인은 그래서 이 땅에서 희망을 가지려면 "아예 희망의 싹이 보이지 않게 와장창 절망해 버리라"고 권한다. 이처럼 양지를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시인이 안식처로 삼는 곳은 서늘한 '그늘'이다. 에서는 '내 그늘보다 더 큰 그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품에 안겨 쉬고 싶어한다. 보통의 남자들이 걷는 길, 즉 아버지에 대한 부정과 긍정의 교차가 시인에게도 예외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아버지는 그에게 '되어서는 안될 사람'이었지만 마흔 살 어느날 거울에 비친 제모습에서 영락없는 아버지의 재현을 발견하고 흠칫 놀란다.() 기자이자 문인으로 살아온 시인에게는 아픈 경험이 있다. 91년 6월 초 어느날 고정희 시인을 앗아간 지리산 조난사고. 당시 산행(山行)의 동반자였던 그에게 그 사건은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는다. 구체적인 사건의 경과를 떠올리고 싶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사건과 사건 사이에 남겨진 인상, 느낌, 그것만 생생합니다"()라고 적을 뿐이다. 아픈 추억이 일사불란하게 정돈돼 간직될 리는 없는 법, 찢기고 갈라진 채 멍한 울림으로 가슴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서울=연합뉴스) 이성섭 기자 leess@yna.co.kr